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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중심으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정치.선거에 개입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국정원 개혁론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정권과 밀착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될 때마다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왔지만, 이번 시건으로 국정원의 시계가 과거로 한참 되돌아갔다는 지적이 많다.
국정원 조직의 전체 문제라기보다는 원 전 원장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사건이 촉발됐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전문성을 따지기보다는 측근을 국정원장으로 기용하면서 선거.정치 개입 문제가 잉태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장에 의해 조직이 흔들리고 불법 행위에 동원됐다는 점을 보면 근본적인 국정원 개혁은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업무범위 벗어난 국정원의 정치.선거 개입검찰이 지난 14일 공개한 원 세훈 전 원장에 대한 공소장은 국정원이 ''정보 수집''이라는 고유의 업무를 벗어나 직접 국민을 상대로 정치.선거 활동을 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현행 국정원법을 보면 국정원은 국외 정보와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작성.배포를 하도록 하고 있고, 국내 보안 정보는 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국제범죄조직에 관한 정보로 한정하고 있다.
국정원법은 또 국정원장이나 직원들이 직위를 이용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의견을 유포하는 행위를 못하게 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원 전 원장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과 시민단체 등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한 것이 국정원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원 전 원장의 지시에 따라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야당과 야권 대선 후보를 비방한 댓글.게시물을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검찰 수사 내용을 보면 원 전 원장이 취임하면서 국정원의 운영 기조가 크게 바뀐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전 정권 초기인 2008년 5월부터 불붙은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를 보고 국정을 흔들기를 위해 선전․선동하는 종북세력에 대해 인터넷상에서 직접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곤 3차장 산하 심리정보국을 확대 개편해 직접 국민들을 상대로 정치.선거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런 상황때문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이 원 전 원장의 개인에게 맞춰지기도 한다. 신율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번 국정원 사건은 원 전 원장 개인의 정치적 판단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가능한 배경을 살펴보면 한 사람의 문제로 돌리기엔 간단치 않은 문제들이 내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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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해외 정보 수집 개편...국회통제 받아야" 국정원 개혁은 국정원이 정보를 독점하면서 정권과 유착해 정치.선거에 개입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전문가들마다 각론에선 차이가 있지만 국내 정치개입을 제한할 수 있는 확실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데에는 주장이 일치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임규철 동국대 법대 교수는 "비상시나 전쟁같은 국가적 위기때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하지만 국가 안보와 무관하게 정치.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메스를 가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우선 국정원의 역할을 해외.대북 정보 수집 중심으로 개편하는 대안이 거론되고 있다.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할수 있는 근거를 없애야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진성준 민주당 의원은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많은 국가들이 해외정보 수집과 국내보안 정보 수집 기관을 분리해서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은 CIA와 FBI, 영국은 MI6와 MI5, 프랑스는 대외보안총국(DGSE), 국토감찰국(DST)로 해외.국내 정보수집 기능이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한과 교수도 "국내 사찰은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며 "안보에 직결되는 정보만 수집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신율 교수는 "미국 CIA 등도 현실적으로 국내 정보수집을 하고 있다"며 "국내 정보 수집을 금지하기 보다는 어디까지 허용할지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할때"라고 말했다.
국내외 정보를 독점하면서 감시.통제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국정원 예산은 본예산 외에 기획재정부의 예비비에 숨겨진 활동경비, 각 부처 정보예산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심사를 받지 않는다.
정보위에서 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국기기밀이라는 이유로 자료제출을 거부하더라도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때문에 실질적인 예산 심의가 이뤄질수 있게 통제장치를 둬야한다는 주장이 많다.
정보 독점의 폐해를 감독하기 위해 별도의 민간기구를 두는 방안도 제시되고 있다.
국정원이 먼저 자체 개혁안을 내놔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공안통인 검찰 관계자는 "정치적 사건에서 불법행위가 드러난 만큼 국정원이 내부적으로 대안을 내놔야할 때가 됐다"며 "그냥 어물쩍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