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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서울 음식?'' 음식으로 만난 서울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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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재발견] ''서울을 먹다''로 만나는 서울의 재발견

''서울 음식''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부터 각 지방 문물의 집산지로서 역할을 해온 도읍, 서울 토박이는 6%에 불과한 이주민의 도시, 국제도시를 꿈꾸는 이 곳 서울에 ''서울 음식''을 찾아본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가능하다. 지금도 우리는 ''서울 음식'' 곁에서 서울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 다만, 무엇이 서울 음식인지를, 그 음식에 담긴 내력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있었을 뿐.

여기서 ''서울 음식''이라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울에서 생겨난 음식(신선로,구절판, 갈비찜, 너비어니 등의 궁중음식과 국밥 등의 서민음식)'', 둘째는 ''서울에서 생긴 것은 아니더라도 서울만의 특징이 담긴 음식(김치 중 장김치, 추어탕 중 추탕 등)'', 셋째는 ''서울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서울만의 독특한 특징도 없더라도 서울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담긴 유명한 동네 음식(종로 빈대떡,청진동 해장국, 신림동 순대, 왕십리 곱창 등).

이 글에서는 ''서울 음식'' 가운데 위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음식, 다시 말해 ''서울에서 생겨났고, 서울만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 서울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담긴 음식''을 찾아 소개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최근 나온 ''서울 음식''에 대한 매우 의미 있는 책 한 권을 인용하면서 그 책에 담긴 ''서울 음식'' 이야기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서울을 먹다''(황교익 정은숙 저. 따비. 2013).

이 책은 ''서울 음식''을 ''서울 사람들이 두루 먹으며, 또 그 음식을 먹으면서 자신이 서울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음식''으로 확장시키며, 17가지의 ''서울 음식''을 서울의 역사와 장소성 그리고 서울사람의 서울살이와 연결지어 풀어내고 있다.

이 기사에서는 책의 17개의 음식들 가운데, 위에서 밝힌 ''서울 음식''의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음식을 몇가지만 골라 그 이야기를 조금씩만 따라가 볼 것이다.

서양 격언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의 총합이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 문화 안에 그 사람이 살고 생각하는 방식이 녹아 있다는 의미다. ''서울 음식''을 통해, 서울, 서울사람, 서울살이를 만나기를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자.

1. 국밥 - 설렁탕과 곰탕

 

 

설렁탕이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는 사실을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서울 토박이 서민들의 가장 사랑받는 외식 메뉴였고, 타지 사람들이 한 번쯤 먹어보고 싶어했던 음식이었던 설렁탕을 1926년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탕반하면 대구(大邱)가 따라 붙는 것처럼, 설렁탕 하면 서울이 따라붙는다. 이만큼 설렁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그래서 서울 큰 골목 쳐 놓고 설렁탕을 팔지 않는 곳이 없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에도, 병든 아내가 경성의 인력거꾼 남편 김첨지가 먹고 싶다며 사달라했던 것이 설렁탕이었고, 이미 죽은 아내의 얼굴을 비비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이라고 울부짖던 그 음식도 바로 설렁탕이었다.

지금도 서울에는 100년이 넘은 한국 最古의 식당인 ''이문설렁탕'', 70년이 넘은 ''잼배옥'' 등의 설렁탕집이 서울 사대문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서울을 대표하는 설렁탕의 기원은, 서울 동대문 근처의 선농단 제사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왕이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농단에서 왕이 제사 후 직접 논밭을 가는 행사를 마친 뒤,행사에 동원된 소를 잡아 큰 솥에 삶아서 그 탕국에 밥을 말은 음식을 백성들에게 먹였으니, 이것이 선농탕에서 설렁탕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곰탕은 설렁탕에서 분화된 음식으로, 설렁탕이 소의 뼈를 함께 끓여 다소 뽀얀 국물을 낸다면, 곰탕은 뼈 없이 고기와 내장으로 끓인 국물이 특징이다. 곰탕의 역사는 1939년에 문을 연 서울 ''하동관''의 역사와 함께 한다. 곰탕은 서울 북촌 반가댁 아씨였던 류창희 할머니의 손에서 만들어졌고, 그가 만든 곰탕으로 70년 넘도록 인기를 얻고 있는 식당이 ''하동관''이다.

설렁탕과 곰탕 모두 빼놓을 수 없는 반찬이 있으니 바로 ''깍두기''다. 신 맛의 시원한 깍두기와 깍두기 국물이 있어야, 설렁탕도 곰탕도 진짜 맛을 내기 마련이고, 이 깍두기 역시 서울의 명물이었다. 지금도 부산의 유명한 설렁탕집 이름이 ''''서울 깍두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렇게 설렁탕과 곰탕이 서울 음식의 대표로 자리잡은 데에는. 서울 음식을 상징하는 메뉴가 바로 ''''국밥''''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전국 그 어느 곳보다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서민들이 짧은 시간 안에 한 뚝배기 안에 밥과 국 그리고 깍두기 국물을 섞어서 후루룩 허기를 달랠 수 있는 메뉴가 바로 국밥이었다.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국밥 음식 가운데 지금까지 그 유명세를 유지하며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설렁탕과 곰탕인 것이다.

2. 떡볶이

 

 

우리가 지금 먹는 떡볶이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보면, 그 꼭대기에는 궁중 떡볶이가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상궁인 한희순 상궁에 의해 그 조리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궁중 떡볶이는 소고기를 간장에 볶고 그 다음 떡을 넣어 볶아낸 것이다.조선의 수도 한성에서 시작된 이 궁중 떡볶이가 서민들에게는 기름 떡볶이로 전국에 펴져갔다.

그러나 우리 떡볶이 역사의 획은 그은 사건은 고추장 떡볶이의 등장이다. 이전까지는 가래떡을 실제로''''볶는'''' 떡볶이였다면, 고추장 국물에 떡을 풀어 조리는 고추장 떡볶이는 조림에 가까웠다.

이 고추장 떡볶이가 한국전쟁이 끝난 뒤 학교가 많은 서울 한복판의 리어카 좌판들 사이에서 등장했다. 특히 70년대 통일벼 제배로 값싼 정부미가 넘쳐난 데다가, 밀가루에 가래떡에 섞여 떡볶이용 가래떡이 싸게 보급되면서, 그 후로 고추장 떡볶이는 전국 좌판을 휩쓴 길거리 대표 군것질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떡볶이 대중화에 있어서 또 한번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즉석 떡볶이''''의 출현이다. 1970년대말 프로판가스가 보급된 것을 계기로, 가스불에 야채와 라면사리를 넣어 손님이 직접 끓여 먹는 떡전골 방식의 ''''즉석 떡볶이''''가 등장했으니, 그 시작이 바로 서울 신당동이다.

서울 신당동 떡볶이는 지금도 떡볶이를 대표하는 이름이다.

3. 족발

 

''''족발''''의 메카'''' 장충동에 가면 족발의 원조를 다투는 간판들이 줄지어있다. 지금 우리가 배달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형태의 족발 요리는 역사가 50년이 넘지 않는데, 그 시작이 바로 서울 장충동이다.

돼지고기를 끓이거나 조려 먹는 음식은 물론 예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간장을 기본양념으로 설탕과 생강 마늘 양파 그리고 더러는 한약재를 섞어 넣은 국물에 돼지 발을 넣어 푹 삶아 만드는 지금의 족발은 조선 문헌에는 없는 음식이다.

이 족발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서울에 들어온 중국 음식 가운데 ''''오향장육'''' 요리의 영향을 받았다.오향장육의 살코기 조림 방식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하고, 재료는 1960년대 돼지고기 수출 후 남은 값싼 부속고기인 돼지 발 부위를 사용한 것이다.

바로 이 족발요리가 등장한 곳이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모여든 장충동이었다. 그리고 이곳 실향민들이 먹던 족발이 전국적인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은 바로 장충체육관 덕분이었다.

60~70년대 장충체육관을 찾은 운동선수와 관중들이 ''''체력은 국력''''임을 실감(!)하며 체육관 앞의 값싼 보양음식 족발을 찾았고, 경기가 끝난 뒤 장충동 족발집은 말 그대로 미어터졌다. 그러면서 잡지와 텔레비전을 장식하더니 장충동 족발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고, 70년대에 전국에 족발집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지금도 ''족발'' 하면, 서울의 장충동 족발이다.

4. 돼지갈비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 이른바 색싯집 골목을 형성했던 서울 마포 만리동 고개에서 ''''돼지갈비''''가 탄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소금구이가 아닌 소갈비식 간장양념을 한 돼지구이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이때 간장양념을 한 돼지고기구이는 살이 적은 갈비 부위보다는 목살, 전지, 후지 등이 더 많이 섞여 나왔고, 1970년대 ''''돼지갈비''''라는 이름을 얻은 이 구이는 지금도 돼지의 갈비살보다는 다른 부위 고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돼지갈비''''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1970년대 서울 강남의 신흥부자들은 이른바 ''''가든''''이라는 이름의 소갈비집을 유행처럼 찾았고, 달콤한 서울식 소갈비구이는 ''''성공한'''' 서울 시민의 상징이 됐다.

강남 부동산 돈 잔치에 성공하지 못한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은 소갈비 대신 뜯을 음식이 필요했으니, 그래서 발견한 것이 ''''돼지갈비''''라는 이름이었다. 달콤한 간장양념이 영락없는 갈비양념인데다가 돼지의 갈비 부위도 섞여있으니 그럴싸했다.

마포 색싯집 골목에서 탄생한 남자의 음식 ''''돼지갈비''''가 이제는 그 달콤한 맛 때문에 여자들이 더 많이 찾는 여자의 음식이 됐고, 삼겹살과 함께 전 국민의 사랑을 고기 외식 메뉴가 됐다.

우리는 지금도 전국의 돼지갈비 식당에서 마포라는 이름을 발견한다.

5. 칼국수

 

칼국수의 역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 1969년 박정희 정권은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치면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 쌀을 아끼고 미국에서 건너온 값싼 밀가루를 소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식의 날에는 전국의 모든 식당에서 분식을 팔게 했고, 도시락도 혼분식이었는지 점검했다.

이때 정부가 내놓은 음식이 바로 칼국수였다. 당시 언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가 해주는 칼국수를 먹는다고 수시로 보도했고 신문에는 칼국수 조리법이 실렸다. 같은 밀가루 음식이라도 ''''가난의 음식''''을 상징하던 수제비 대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먹는다는 칼질해서 요리한 칼국수는 그럴싸해보였다.

이런 가운데 1969년 분식의 날 서울 명동에 지금 칼국수의 상징이 된 ''''명동교자(명동칼국수)''''가 개업했다. 정치의 음식인 칼국수였기에, 개업하자마자 정치인들이 줄을 이었고, 사무실과 쇼핑 공간이 많은 명동이기에 평일에는 직장인, 주말에는 가족의 외식 장소가 됐다. 그리고 90년대 이후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주요 고객으로 자리잡았다.

C

 

명동 칼국수는 이렇게 우리나라 칼국수의 대명사가 됐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울을 먹다''라는 책을 따라, ''서울 음식'' 5가지를 만나봤다. 이 기사를 보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나머지 12가지 음식 이야기를 더 만나보기를 강력히 추천해드린다.

기사로 살펴봤듯 각각의 ''서울 음식'' 속에서는 서울사람과 서울살이의 특징 나아가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사가 녹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주말에 친구 혹은 가족과 함께 ''서울 음식''을 즐기면서 진짜배기 서울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픈 분들은 twitter.com/js8530 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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