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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눈물 관객이 닦는다…''지슬'' 독립영화 새 흥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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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만 돌파 눈앞…피해·가해 아픔 아우르는 진실규명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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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예산 독립영화 한 편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제주 4·3을 다룬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를 두고 하는 말이다.

4·3은 애쓰고 애써도 쉽게 걷히지 않던 한국 현대사의 한 조각 짙은 어둠이다.

그 어둠을 밀어내고 한 줄기 빛을 드리운 것은 두 시간이 채 안되는 한 편의 흑백영화였다.

지슬은 28일까지 12만 9379명을 모으며 우리나라 독립영화의 흥행사를 새로 쓰고 있다.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에서는 매년 음력 12월19일이 돌아오면 거의 모든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1948년 이날 하루에만 마을 주민 354명이 목숨을 잃은 탓이다.

고효양 제주4·3유족회 간사는 노컷뉴스에 "4·3 유족 2세대인 제 고향이 북촌인데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같은 날 제사 지내는 것을 풍속처럼 봐 왔다"며 "누구도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 자라면서 지레짐작만 하다가 1999년 제주4·3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4·3은 제주 주민 3만여 명이 군인·경찰 병력 등에게 학살된 사건으로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1일까지 7년 7개월간이나 이어졌다.

해방 직후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와 어수선한 정국이 이어지던 중 남한 단독정부 수립, 6·25전쟁을 거쳐 이승만 정권이 잔당 소탕을 명목으로 유혈진압을 벌이던 때다. 

4·3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특별법을 만들기 전까지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었다. 암묵적인 함구령의 힘이 얼마나 컸던지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김창후 (사)제주4·3연구소 소장은 "특별법에 따라 이뤄진 진상조사 결과 4·3 당시 사망자는 2만 5000명~3만 명인데 직접 신고를 받은 수는 절반가량인 1만 5000여 명에 머물고 있다"며 "실제로 다니다 보면 아직도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 ''달라질 것이 뭐 있냐''며 신고를 꺼리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고 전했다. 

이렇듯 무의식 깊숙이 박혀 있던 4·3 함구령을 걷어낸 것이 영화 지슬이다. 

영화의 배경은 1948년 11월 해안선에서 5㎞ 밖에 있는 사람은 모두 폭도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떨어진 뒤의 제주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용필, 경준, 만철, 상표, 무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민들은 각자의 삶에 충실하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였다. 

주민들이나 토벌대 군인들의 말 하나, 몸짓 하나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뒤 극으로 치닫던 이념 대립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굴곡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슬2

 

그래서일까.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휩쓸려 이름을 잃어 버린 채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몸으로 자신의 역사를 말한다.

그들의 역사를 모두 모아 그려낸 이 영화는 ''빨갱이'' ''반동분자''라는 말이 놓치고 있는 무한한 인류애를 담고 있다. 

제주도민 최희영(33) 씨는 "고등학교 국사책 두 줄로 4·3은 폭동이라고 배웠는데 커서 1946년생인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숨어다니시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실 뻔 했다고 하더라"며 "지슬이 4·3을 어떻게 다룰까 우려도 많았는데 보고 나서 ''오멸 감독이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을까''라는 고마움이 들더라"고 말했다. 

또 다른 도민 박정미(43) 씨는 "4·3은 워낙 가려져 있던 일이라 제주의 젊은 사람들조차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일로 알거나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제 외할아버지도 4·3과 관련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그동안 느끼지 못하던 공감대를 얻었다"고 했다. 

영화 지슬은 제주도민뿐 아니라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자세도 변화시키고 있다. 

안은주 (사)제주올레 사무국장은 "제주 올레길 코스에는 4·3 유적지가 여러 곳 있는데 지슬 개봉 이후 관광객들이 이곳 유적지를 찾는 횟수도 많아지고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다"며 "지슬이 4·3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육지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영향으로 본다"고 전했다.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이제라도 4·3의 아픔을 다독여 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4·3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로 불리던 이들이 부부가 되고 사돈이 돼 함께 살고 있는 곳이 제주다. 

고효양 4·3유족회 간사는 "지슬을 본 당시 피해자들은 ''잔혹한 사실을 너무 순화시킨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고, 토벌대로 있던 이들의 모임인 경우회는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인데 4·3 관련 영화가 나오면 항상 이런 문제가 불거졌다"며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인 만큼 유족회 입장에서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경우회와도 화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3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성격을 밝혀내는 것도 큰 과제로 남아 있다. 

김창후 4·3연구소장은 "앞서 발표된 진상조사 보고서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추가 조사를 벌이고 있는 만큼 3, 4년 뒤면 정확한 피해 실태가 파악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문제는 4·3의 성격 규명이 제대로 안 될 것이라는 점인데 학계에서만이라도 보수, 중도, 진보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폄하하지 말고 해방 정국에서의 통일 운동 등 여러 움직임이 모두 거론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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