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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사진촬영이 있는 날이다. 3.1운동 이후 조국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우리는 러시아, 중국, 미국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우여곡절끝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됐다. 이제 임시정부는 김구,안창호, 여운형, 이승만과 함께 하게 됐다.
기획취재 : 박기묵, 배덕훈, 김세준, 정재림, 이한얼 디자인 : 이영신 퍼블리싱 : 고지민 개발 : 김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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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27년간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의 일기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하되, 시기별로 볼 수 있도록 인터렉티브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해방이라는 고상한 일 하지 말고 어서 기술이나 배워라!"
"니 나이 때는 그런 철학에 빠질 수 있지만 나이 먹으면 다 쓸모 없는 얘기다"
상해의 황포강변을 걷는데 어머니의 애끓었던 울음소리가 바람에 스쳐 내 귓등을 때린다. 독립운동의 큰 꿈을 가지고 상해에 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상해는 임정 요인끼리 아귀다툼하는 소리가 여전하다.
상해 외탄거리
외교독립론, 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 임시정부는 아직 노선을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렇다고 상해에서 우리의 생활이 편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다 풀어 놓자면 이 중국 땅을 가득 메워도 모자랄 것이다.
우리에게 돈이라는 건 곧 생존이다.
월 30원인 임시정부 청사 가옥세도 몇 달째 밀려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의 며느리 정정화 여사가 임정 자금을 구하기 위해 10년 동안이나 국내와 상해를 오갔다. 체포와 죽음의 위험을 감수한 모험이었다. 하지만 정 여사의 지인과 친인척의 돈만으로 임정을 운영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 여사는 “이름, 명예, 긍지보다 급한 것이 생존이다”라며 임정의 경제사정에 한숨 쉬셨다.
안창호 선생도 “돈이 있다면 돈을 내놓는 것, 돈을 버는 것부터가 대한 독립의 시작이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재정에 무관심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안 선생의 말 대로 고국에서 떨어진 이 곳 상해에서 우리를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이는 없다.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낮에는 전차회사 검표원, 밤에는 임정요원이었다. 검표원을 안 하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가 없다.
중국 상해 거리
검표원은 중국인 전차 차장이 승객의 요금을 횡령하는 지 감시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많을 때는 수십 명의 한인이 같은 전차회사에 근무했다. 꼭 임정 요인이 아니더라도 한인 검표원은 단체를 만들어 수입 가운데 일부를 독립운동단체와 인성학교에 기부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안정은 검표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월급은 30원이었다. 이중 10원은 집 세로, 10원은 임정 독립자금으로 나갔다. 결국 남은 건 10원인데 이 월급으로 한달을 사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다.
상해 대부분의 한인은 나같이 전차회사의 검표원으로 일하며 받은 박봉으로 팍팍한 삶을 이어 나갔다.
일부 몰상식한 중국인은 우리를 ‘망국노’라고 부른다. '나라 잃은 노예들’이란 뜻인데 이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중국인과 충돌이 나기 일쑤였다. 심하면 중국인과 다툼 속에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굶주림보다 더 슬픈 것은 나라를 잃은 자존심이었다.
우리더러 ‘왜 상해에 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당초 우리가 상해에 임시정부를 설립한 데에는 호기도 있었지만 합리적 근거들이 있었다. 먼저 신해혁명의 거점도시인 상해는 특성상 혁명적 세력이 많았다. 육로는 멀지만 배를 타면 가장 가까운 것이 상해기도 했다. 베트남, 인도 등 아시아 혁명 세력과도 연락이 편했다. 여기에 우리 청사가 있는 상해 김신부로가 조계 프랑스 지역인 것도 한 몫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이 상해에 있는 프랑스 행정구역에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해는 사실상 사상의 용광로나 다름없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열기는 각지에서 들끓었다. 이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반영해 총 8곳에 임시정부가 생겨났고, 그 중 세 곳에 체계를 제대로 갖춘 임시정부들이 수립됐다. 1919년 4월 19일에 설립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고국의 한성에 생긴 한성정부가 그곳이다.
상해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제6회 기념 사진
임시정부가 세 곳으로 나뉘다 보니 일본에 대항하는 화력도 분산됐다. 결국 세 곳의 임시정부 요인들은 임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하루는 연해주에 있는 대한국민의회 원세훈 선생은 상해의
임시정부로 찾아와 주요 요인들과 차담을 나누며 “연해주는 정부의 배후가 될 교포가 많고 우리나라 본토와의 거리가 상해보다 가깝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이동휘 선생, 김립 등은 “본토와의 거리만으로 통합의 중심이 될 곳을 정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며 통합에 반대했다.
지리한 통합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 선생이 등장했다. 안 선생은 5월 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에서 지원받은 지원금을 가지고 상해 의정원으로 왔다. 안창호 선생은 “연해주, 중국, 미국 각지로부터 정식 의정원을 소집해 거기서 주권자 3인을 택한 후 그 셋이 일곱 차관을 뽑아 의정원에 통과 시키는 게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첫 청사 (조계 내 보창로)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설득했다. 그는 상해의 안창호, 연해주의 이동휘, 미주의 이승만이 모인다면 통합 가능성이 있겠다고 본 것이다. 안 선생의 의견에 이승만 선생과 이동휘 선생 또한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통합논의가 완료되자 상해 임시정부는 한성정부를 참고해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19년 9월 한성, 연해주, 상해를 통합한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승만 선생을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대한독립청년단장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 선생이 주창한 위임통치론을 거론했다.
국무총리 이승만 임명장
“차라리 날 죽이시오! 미국에 편안히 들어앉아 위임통치나 부탁하는 이승만을 어떻게 정부 수반으로 모실 수 있단 말이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 아니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
결국 신 선생은 격노한 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북경으로 건너가 버렸다.
막 출발한 임시정부의 과제는 분명했다. 독립전쟁을 하겠다는 점에서 전시정부와 비슷하지만 실질적인 군대를 갖지 못했고,국외에 수립됐다는 점에서 고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기가
힘들었다. 한 마디로 가진 것은 없지만 해야 할 것은 산적했다.
그렇게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어느정도 자리를 갖춰가던 어느날 이봉창이란 작자가 상해 임시정부에 들어왔다. 일본인과 흡사한 외모와 동작. 그의 말은 절반이 일어였다. 스스로도 봉창이라는 이름보다는 기노시타 쇼죠가 익숙하다고 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인생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
그는 우리에게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방문한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했지만 우리의 신뢰를 사기는 힘들었다.
당시 우리는 이봉창을 일본의 밀정이라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 그를 처단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봉창은 자신이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고 일신상의 이유로 일본인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고 말했다.가게에서 일을 하며 한국 사람이라고 차별을 받자 아예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죠로 이름까지 바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출신이 대한이라는 주홍글씨는 일본인에서 생활하는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일본 천황의 행차 때 검문 과정에서 한글로 된 쪽지가 이봉창에게서 발견됐다고 일본 순사로부터 호된 고초를 받았다고 한다. 결국 이봉창은 기노시타 쇼조도 되지 못했고 될 수도 없는 현실에 개탄해 상해로 들어오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 같은 불신에도 김구 선생은 이봉창을 신임했고 1년 동안 공장에서 위장취업 후 대사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봉창은 의거 직전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를 향해 "나는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요요기 연병장에서 돌아오던 일왕 히로히토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암살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이봉창은 그해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우리는 이 선생의 의거에 큰 감화를 받고 더욱 가열차게 독립운동에 힘을 쏟기로 결의했다.
경시청에서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는 이봉창
윤봉길 선생도 거사를 결심한 임정 식구였다.
윤 선생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고향에서 학교 운영과 계몽운동을 하다가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본인의 신념으로 상해에 당도했다.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선생은 김구 선생과 논의 후 4월 29일 일황 생일을 기념해 상해에서 열리는 관병식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윤선생은 1932년 4월 26일 선서문을 작성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치를 것을 정식으로 선언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1932년) 4월 26일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과 권총을 쥐고 있는 윤봉길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해 중국 내에 있을 기념식 정보를 입수했다. 의거에 투척할 수류탄은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내 거사당일인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와 자결용 도시락모양 폭탄 1개를 감추고 기념식장에 잠입했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부상을 입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는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의거 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압송당하는 모습
윤 선생은 거사직후 일본 헌병에게 즉시 체포되고 말았다.
윤 선생의 의거에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크게 감화했다. 국민당 주석 장개석 선생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우리를 격찬했다.
하지만 윤봉길 선생의 의거가 긍정적 작용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윤봉길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프랑스 조계당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압박에 굴복한 프랑스 조계당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임정의 안전장치가 사라졌다.
임시정부는 윤봉길 선생의 의거 덕분에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됐다. 다른 한편으론 일본이 임시정부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상해를 떠났지만 우리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진 상태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이 밀정 300여 명을 푸는 동시에 현상금 60원에 달하는 거액을 걸어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본에 체포당하는 악몽을 꿨다.
저보성 초상화
항주 임시정부가 자리 잡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해 김구 선생은 항주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김 선생은 항주가 아닌 절강성 가흥에서 피신생활을 시작했다. 김 선생이 가흥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데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절강성 주석 저보성 선생의 도움이 컸다.
저보성 주석은 가흥 일대의 유지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는 윤봉길 선생의 의거 후 우리 독립운동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해주는데 힘을 써주었다. 저보성 주석은 양아들인 진동생의 집에 우리를 머물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김구 선생과 나는 일제의 포위망이 심해진 항주를 벗어나 가흥에 머물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김 선생은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분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라며 저보성 가족의 도움을 고마워 했다.
가흥 피난시절 임정 요인들과 도움을 준 중국인 (가흥 저봉장 집 어린이 왼쪽: 김자동(김의한 아들). 엄기동(엄항섭 아들). 엄기선(엄항섭 딸) / 1줄 왼쪽: 진동생 부인. 정정화(김의한 부인). 민영구 어머니. 연미당(엄항섭 부인). 주가예(저보성 며느리) / 2줄 왼쪽: 진동생. 중국인.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저봉장)
안락하진 않았지만 김구 선생은 저보성 선생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임시정부내의 갈등이었다. 실질적 지도자인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청사에 닿지를 못하니 임시정부내의 당파는 사분오열 하며 자기들끼리 새 체제를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최동오의 조선혁명당, 윤기섭의 한국혁명당, 한일래의 조선의열단, 김규식의 한국광복단동지회는 통일동맹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지금의 임시정부 폐지를 꾀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올라설 계획을 세웠다. 김구 선생은 이에 극히 대노하며 “작금의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와 다름없다. 각 당의 화력을 하나로 합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일전선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슬퍼했다.
‘이 투쟁의 끝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이 일기를 작성하는 지금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항주에서 사분오열 되던 임시정부의 각 세력을 제대로 봉합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또 고단한 여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상해에서 이동하며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줄곧 받았지만 국민당 정부와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었던 터라 실질적으론 각 도시의 성주에게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국민당 정부의 보다 직접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남경 근처인 진강으로 청사를 옮기게 됐다.
그러나 진강과 남경이 지정학적으로는 임시정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정작 생활의 터전이 잡힐 만하면 이동을 해야만 하는 우리의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김구선생과 나는 남경 부자묘 거리의 회청교 인근에 방을 얻어 생활했다. 김구 선생은 고물상으로 위장을 했고 나는 인근을 배회하는 노숙자로 행세하며 일본의 감시를 피했다. 저보성 주석의 소개로 진강에서부터 도움을 줬던 주애보 양도 같이했다. 사실 그녀는 김구 선생의 아내역할로 위장해 김구 선생을 숨겨줬다. 그녀는 본인도 끼니를 제때 채우지 못하면서 동네 식당에 들어가 거지 행색을 해 구걸을 하곤 했다. 우린 그 음식을 먹으며 하루 하루를 버텼다.
남경에서 김구와 부부로 행세하며 김구를 도운 주애보
우리와 주애보의 여정이 갈라지던 날.
“여태까지 고생해온 그대에게 여비로 100원밖에 드리지 못한다는 게 내 못내 한으로 걸리오. 독립된 조국에 들어서거든 내 그대에게 제일 먼저 보답할 것이외다.”
김구 선생은 이 한마디로 만남을 정리했다. 김구 선생을 바라보던 나도 먹먹한 가슴을 누를 길 없었지만 감성에 빠질 겨를은 없었다. 김구 선생은 차리석, 김붕준 등을 각각 상해 광동으로 파견해 진강에서 와해됐던 임시정부의 봉합을 꾀했다.
그는 “이렇게 임시정부가 해체 수순을 걷게 된다면 우리가 타지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하는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단결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남경에선 일본과 중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중국이 밀리자 일본 비행기의 남경 폭격도 심해졌다. 폭격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한 어느 날 나는 공습 경보 해제 후 깜빡 잠이 들었다.
“두두두두두두-쿵쿵쿵”
갑자기 기관포 소리가 들렸고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밖을 나섰다. 잠시 후 천장과 벽이 진동하며 내가 누웠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중국의 대일전선이 남경에서 급히 후퇴했다. 임시정부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요인들에게 소식을 넣어 남경으로 집결토록 했다. 나와 김구 선생을 비롯한 100여명의 임정 식구들은 목선 한 척을 빌려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장사에 도달했다.
임시정부 이동 피난 목선. 진강에서 임시정부 식솔 3백명이 목선을 타고 장사에 도착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갑작스럽게 장사로 옮겨오느라 단체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린 각자 방을 얻어 생활했고 고생도 심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장사에서의 생활에 이내 만족하는 듯 했다.
“우리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이 되고 있고, 경제 방면으로는 이미 남경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외 미국 한인 교포의 원조가 있으니 우리는 ‘고등난민’의 자격이 아니더냐”
김구 선생은 늘 한결같이 힘든 현실을 껄껄 웃어 넘겼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안정감도 잠시, 임시정부의 짙은 먹구름이 끼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김구 선생이 장사로 정부를 옮겨온 그해 5월, 그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의 3당 통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남목청으로 향했다.
주요 인사들이 모여 연회가 시작될 즈음 조선혁명당 소속인 이운한이라는 작자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다짜고짜 요인들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급히 책상 등에 몸을 숨겼다. 이윽고 네 발의 총성이 더 들렸고 정적이 찾아 왔다.
세를 살피니 이운한은 도망가고 없었다. 현익철, 유동열, 이청천, 김구 선생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나와 하급관리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주요요인들을 인근의 상아의원이라는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김구 선생은 병원 이송 직후에도 혼수상태가 이어져 의사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 까닭에 병원 입원 수속조차 밟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뜻인지 끊길듯 하던 숨이 네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김구 선생의 치료를 요청했다.
이후 큰 수술 몇 번을 거치고 김구 선생은 의식을 회복했고, 기적적으로 위중했던 병세가 낫기 시작했다.
문제는 장기간 이어진 병원 입원으로 궁핍해진 우리의 주머니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당도했다. 국민당의 장개석 선생이 3000원이라는 거금을 우리에게 보낸 것이다. 덕분에 병원비는 물론 퇴원 후에도 김구 선생의 몸조리를 살뜰히 살필 수 있었다.
남목청에서 이운한에게 저격당해 상아의원에 입원한 김구
국민당 정부는 이운한을 체포해 옥에 가뒀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탈옥했다. 이운한의 범행은 미궁속에 빠졌다. 항간에선 조선혁명당에게 떨어지는 생활비가 부족해서 앙심을 품었다고 하는 설과 이운한이 일본의 밀정이라는 설들이 돌았지만 정확한 경위는 알 길이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중국군의 대일전선은 날이 갈수록 후퇴일로였다. 일본군이 호북성까지 진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가 머물던 장사에도 위기감이 감돌았다. 마침내 일본군은 장사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번 더 이동을 감행했다.
1938년 7월 호남성 장치중 주석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일본 비행기의 공습은 지독히도 우리를 괴롭혔다. 공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기차를 멈추고 잠시 풀숲에 몸을 숨겼다. 다시 잠잠해지면 기차로 돌아와 이동을 반복했다. 기차는 만 3일만에 광주에 당도했다.
우리가 도착한 광주는 손문의 광주봉기가 일어나 국공합작을 한 곳이었다.
손문
지금은 없어졌지만 광주는 당시 손문이 소련 코민테른의 자금을 받아 중국 최초의 군대식 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 곳이기도 했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수학하던 후보생들
그리고 친숙한 대상인 조선혁명당 김원봉 선생도 이곳을 졸업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묘한 감정을 주는 도시였다.
약산 김원봉
우리는 이미 광동성 주석 오철성에게 임시정부 청사와 임시정부 식구들의 거처를 부탁해놓아 큰 시름거리 없이 광주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임시정부청사로 쓰인 광주의 동산백원
임시정부 청사는 이전부터 중국 군사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석. 채원개 두 사람의 소개로 '동산백원'을 청사로 하고, 인근 '세아여관'에 식구들을 수용시켰다.
임시정부 청사는 이전부터 중국 군사방면에 복무하던 이준석, 채원개 두 사람의 소개로 ‘동산백원’을 청사로 하고, 식구들을 인근 아세아여관에 묵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광주로 이동한 지 채 3개월도 되지 않아 일본군이 광동성 인근까지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포격에 대한 공포, 불안, 불면. 나는 차라리 일본군의 폭격을 온 몸으로 맞고 저승에서 대한의 독립을 돕고자 하는 맘도 들 정도로 피폐해졌다.
결국 김구 선생은 나에게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이동할 것을 명했고 그는 조성환, 나태섭 선생과 함께 중경의 장개석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길을 떠났다. 나는 100여명에 달하는 임정 식구들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국민당 정부에서 기차 한 칸을 통으로 내어준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식구들과 내가 역에 도착할 무렵 귀신같이 일본군의 폭격이 시작됐다. 일본군의 폭격 소리가 들리자 기차역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혼란스러운 상황은 역사의 중국 군인들이 임정 식구들을 기차 안에 먼저 들여보내면서 일단락 됐다. 어렵사리 출발했지만 이동 중 폭격은 끊이질 않았다. 결국 중간에 두 번이나 배를 갈아타고 40여일의 천신만고 여정 끝에 유주에 도착했다.
유주로 이동하는 배 안에서 정정화 선생은 나에게 “중국에는 소주에서 낳고, 항주에서 살며, 광주에서 먹고, 유주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란 말이 있다”며 지친 나를 위로했다. 방직 공장이 많은 소주는 옷을 입기 좋고, 풍경이 좋은 항주는 삶을 즐기기 좋고 열대과일과 요리가 좋은 광주는 음식이 좋고, 아름드리나무가 많은 유주는 심지어 관을 잘 만들기도 유명해 삶을 마무리하기에도 좋다는 것이다.
정정화 선생(김자동 회장 어머니)
유주에 도착하고 난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또 공습경보가 울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나는 일단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지역 사람들이 방공호로 쓴다던 동굴에 몸을 숨겼다. 동굴에 몸을 숨기자마자 폭격기의 작탄이 작렬하는 굉음이 진동했다. 이윽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폭격이 멈췄고 동굴 바깥으로 나가자 참혹한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저기 파인 웅덩이에 시체가 널부러져 산을 이루고 있었다.
민간인들을 이토록 학살한 일제의 만행은 역사가 기억하리라.
하지만 계속 슬퍼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안전한 곳을 계속 찾았고 낙군사라 불리는 곳에 임시정부 터를 잡았다. 중국 관리는 우리에게 이곳이 원래 버스터미널로 지었던 곳인데 새로 수리를 해서 호텔로 쓰였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낙군사는 우리 임정 식구들이 들어오기 전 장개석 선생 등 유명인사들이 많이 머물었던 곳이라 시설면에서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유주를 떠나면서 중국의 각 단체대표들과 기념촬영
유주에서는 임정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설립됐다. 애초의 목적은 유주의 중군군 병사들을 위로하는 공연을 통해 항일전선을 고취시키려는 선전이었다.
우리 청년들이 어찌나 노래와 춤을 잘 추던지, 청년들은 중국 국민들의 관심과 호감까지 이끌어 냈다.
1939년 3월 우리는 관내 용성중학에서 3.1운동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고, ‘한국독립선언 20주년 기념선언문’도 발표했다. 청년공작대의 애국가, 유주의 고위 인사들의 연설로 분위기는 고조됐고, 장내에는 눈물을 보이는 사람들도 이따금씩 보였다.
3.1운동 20주년 기념 공연
“첫째 정치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한 기본권을 갖는다. 둘째 경제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한 생활을 할 권리를 갖는다. 셋째 교육적으로 완전한 해방을 향유하여 사람마다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갖는다.”
우리들은 일본의 공습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곧 광복이 올 것을 확신하며 ‘공화정’ 국가로서의 독립을 염원했다.
그 즈음 장개석 주석을 만나러 중경으로 가 있던 김구 선생의 연락이 닿았다. 선생은 유주가 본인이 머물고 있는 중경과 거리가 멀고, 직접적 지시가 닿기 어려우니 중경으로 올수 있는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단 유주는 일본군의 공습에 안전하지 않으니 기강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했다.
며칠 뒤 우리는 여섯 대의 버스에 나눠 탄 채 기강으로 향했다.
우리는 장장 9일동안 버스를 탄 뒤에야 기강에 내릴 수 있었다. 기강에 도착한 이후, 남은 임정 식구들은 모두 한숨을 돌렸다. 나도 떠돌이 임정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고, 임정 국무위원들을 모시는 가운데서도 내 자신을 챙길 여유도 생겼다.
석오 이동녕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같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임정이 기강으로 옮긴 지 1년을 한 달 앞둔 40년 3월 임정의 주석을 역임했던 어르신 이동녕 선생께서 죽음을 맞았다.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이자 큰 어른으로 존경 받던 이동녕 선생의 죽음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이동녕 선생은 임정 내 사분오열된 당들이 하나로 통합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장례식(1869.10.6∼1940.3 .13)
이동녕 선생의 유언은 임정의 당파 통합이었다. 실제 통합 작업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 또한 여러 차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요구했던 터였다.
이에 따라 국민당 정부는 김구 선생에게 통합의 뜻을 전했고 김구 선생이 찬성하자 김원봉 선생에게도 연락했다.
1940년 1월 마침내 두 사람은 만남을 가졌다. 민족진영과 좌파진영을 대표하는 두 사람은 ‘동지·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했다. 주의와 사상을 초월하자는 성명이었다. 얼마 뒤 기강에서 ‘한국혁명운동 7단체 회의’가 열렸다.
한국독립당 창당 사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 민족진영과 좌파진영을 총 망라한 단체가 모여 논의를 시작했다. 7개의 단체가 모인 만큼 회의는 쉽지 않았다. 각 당의 이해관계가 극히 대립됐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
그러나 광복진선에 속하는 3당은 한국민주독립당이란 이름으로 통합 정당을 창당할 것에 합의했다. 임시정부의 지도체제도 국무위원제에서 주석제로 변경했다. 새 주석에는 김구 선생이 선임됐다. 임정 사람들 사이에는 김구 선생이 이제부터 명실상부한 임시정부의 대표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중경으로 이동했다. 이동 후 혹시 도사릴지 모를 위험을 줄이기 위해 김구 선생은 중경의 장개석 주석으로부터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약속 받았고, 무사히 중경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임정 식구들은 중경의 외곽인 토교에 자리를 잡았다. 임시정부는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 원의 원조를 받아 이곳의 땅을 15년 기한으로 빌렸다. 그리고 집 세 채를 새로 짓고 10여 가구가 이곳에서 새로이 생활을 시작했다.
중경에서도 궁핍한 생활은 계속됐지만 저마다 텃밭을 가꾸고 고구마와 옥수수를 재배하며 식구들끼리 나눠 먹었다. 팍팍한 생활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운 날들이 계속됐다. 정정화 선생은 이런 생활이 퍽 맘에 들어서인지 나에게 흡사 고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본격적인 국가 기틀을 닦았다. 임시정부는 기강 때부터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논의했고 1940년 9월 17일 가릉강 기슭에 위치한 가릉빈관 호텔에서 마침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열었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서 대회사를 하는 김구.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이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 관에서 거행되었다.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중국인, 기타 외국인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광복군 창설의 실무 작업은 군사간부로 일하던 지청천, 이범석, 유동열, 김학규 선생들이 맡았다. 지청천 선생이 한국광복군의 초대 총사령으로 임명됐고, 참모장은 이범석, 각 지대장은 이준식, 공지원, 김학규, 나월환 선생이 맡게 됐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내 큰 난관에 봉착했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을 자기들 지도아래 두고자 하는 속셈으로 한국광복군의 승인을 불허하는 것이다.
지난한 교섭 끝에 중국의군사위원회는 1941년 5월 한국광복군을 지휘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을 승인했다. 비록 중국군의 지휘를 받게 된 게 아쉬웠지만 드디어, 나름대로 국가의 정규군으로서 무력을 갖추게 됐다는 생각에 나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한중 대표 한국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였다.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이 열렸다. 총사령관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앞줄 왼쪽 여섯 번째부터 홍진, 이청천, 김구, 차이석이고, 한 사람 건너서 이시영이다
실질적인 물리력을 갖게 되자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등 임정 지도부는 협의 끝에 일제에 무장투쟁을 벌이자는 결론을 내게 됐다. 그리고 일제가 진주만을 공습한 지 이틀 뒤인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군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선전포고서는 사실 상징적인 문서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을 치루는 일본과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광복군의 궤멸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력을 우회적으로 이용해 일제를 몰아낼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추축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연합군에게 일단 독립 승인을 받고 연합군의 작전에 공동 참여하자는 안에 힘이 실렸다.
그런데 임정에는 연합군과 직접 연결한 통로가 없었다. 따라서 국민당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락을 꾀해야 했다. 우리는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국민당 정부는 미국이 우리를 승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당은 임시정부를 국민당 단독으로 승인하는 것이 어렵다다고 통보해왔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큰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즈음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1943년 11월 경 미국, 중국, 영국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대일항전과 전후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회담을 갖는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연합군에게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힘쓰던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곧장 국민당 장개석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선전부장, 지청천 광복군총사령, 김원봉 선생 등이 장개석과의 면담을 위해 회담장에 나갔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줄곧 국제공동관리설에 대해 반대하며 장개석을 설득했다. 장개석은 미국과 영국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지만 힘써보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1943년 12월 1일 연합국 수뇌가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카이로 선언’이 발표 됐다.
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연합국측 고위관료들(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연합국측 고위관료들. 앞줄 왼쪽부터 장개석 총통,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송미령. 뒷줄 왼쪽 세번째는 Anthony Eden, John G. Winant, Eden의 왼쪽부터 왕정위 박사(안경), R.G.Casey.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부터 Averill Harriman, Harold Machillan 의원.)
선언문에는 애매한 어구 등이 있었다. 임시정부 내 갑론을박도 이어졌지만, 일단 우리에겐 너무나 큰 호재였다. 1945년 2월, 우리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전략정보국인 OSS도 우리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 계획에 함께하기로 했다. OSS의 작전은 광복군을 한반도에 진입시켜 첩보활동을 한다는 계획인 ‘독수리 작전’을 수립했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은 서안에서 미군에게 3개월 과정의 군사 교육을 받았다.
미군 OSS에서 위탁교육 받던 한국광복군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등 군 지휘관이 미군과 협의한 결과 국내 진공 작전은 크게 세 단계로 계획됐다. 1단계, 광복군 대원들이 잠수함으로 국내에 진입. 2단계, 국내에 거점을 마련하고 공작을 통해 인심을 선동. 3단계, OSS측과 연결해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적 후방에서 대규모 무장.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미군에 3개월 간 교육을 받으러 갔던 우리 군사도 이제 출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9일 나는 김구·지청천 선생과 함께 서안에 머물고 있었다.
8월 9일 나는 김구선생과 섬서성 주석 축소주의 관저인 서안에서 저녁만찬에 참석하고 있었다.
대략적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축소주 주석과 김구 선생 나는 후식으로 수박 몇 점을 들던 참이었다.
이윽고 관저 안방에서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축소주는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에게 소리쳤다.
“일본군이 항복한답니다”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침묵에 잠겼다. 나는 김구 주석을 바라만 보았다. 침묵은 오래 갔다.
김구 선생은 착잡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이 소식이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인 기분일세.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마는 형국인데 이에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온 광복, 거의 다 준비됐던 국내 진공작적 무산. 임시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당장 미국과 임시정부의 이전에 대해 협의해야 했고, 중국에 거주 중인 한인의 입국도 관장해야 했다.
우리는 곧장 미국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국내에서 정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의 뜻과는 다르게 미국은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허락한다고 입장을 표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극노를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며칠 못가 김구 주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 요인이 모두 귀국하는 것은 정부가 귀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구 선생은 귀국 채비를 서두르자고 명했다. 귀국이 결정되자 중경에서 상해까지는 중국이상해에서 대한까지는 미군 측에서 필요한 교통편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10월 하순경에는 중국의 환송연도 열렸다. 장개석 주석은 특별히 환국 경비로 1억 원과 미화 20만 달러를 내어주었다. 27년을 옮겨 다니며 이런 극진한 도움만 받으니 미안한 마음이 마음속을 떠나질 않았다.
11월 3일 중경 청사인 연화지에서 환국기념 사진을 촬영을 했고, 이틀 후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그 달 23일, 오늘. 나는 김구 주석과 비행기에 올랐다. 김구 주석은 국내로 돌아가면 임시정부 때보다 더 큰 혼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나에게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27년만에 고국을 만난다는 생각에 떨리는 가슴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나는 기억을 잊기 전에 임정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기내에서 마지막 일기를 쓰고 있다. 영광스러움, 슬픔, 기쁨, 환희와 같은 것들이 한데 뒤섞여 설명하지 못할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고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해방은 우리에게 왔다.
중경 연화지 청사에서 환국기념사진을 찍은 임정 주요인사들
참고 자료 :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박광일/생각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사(김병기/이학사), 백범일지(양윤모/더스토리), 제시의 일기(양우조 독립운동가 최선화 저/우리나비) 장강일기(정정화 독립운동가 저/학민사)
사진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제공
※본 콘텐츠는 올해 2월15일~2월24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이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가며 기록한 로드 다큐입니다. 100년전 27년이 걸렸던 4000km의 경로를 기차와 자동차를 이용해 10일간 뒤쫓아본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역시 시기별로 볼 수 있도록 인터렉티브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임시정부 27년의 역사가 시작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그 유구한 역사의 첫 시작을 알린 장소로 떠났다.
상하이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가 일행을 맞이했다. 한국과는 다른 낯선 공기가 감싸고 있는 이곳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원류가 된 역사적 장소들이 있고, 또 그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이제 시작한다고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제일 먼저 찾아야 할 곳은 마당로. 바로 상하이 정부 청사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푸동 공항을 출발해 상하이를 가로지르는 황포강을 건너 차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한마디로 이채로웠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현대식 건물들과 과거 건축 양식을 보존하며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아편전쟁 후 개항한 상하이를 찾은 임시정부 요인들도 과거의 건물과 서양 문물이 유입돼 지어진 신식 건물들의 모습을 보고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이런저런 상념을 하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상하이시 황포구 마당로 보경리. 이곳은 임시정부가 항저우(항주)로 이동하기 전까지 6년여 간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 된 곳이다. 전문가들은 마당로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이전에
김신부로(현 서금이로), 하비로(현 화해중로) 등에 청사가 위치해 있었다고 말하지만, 현재는 흔적조차 사라져 이곳이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다.
청사 유적지 1층에 위치한 매표소에서 티켓을 끊고 임시정부 관련 짧은 영상을 시청한 후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청사에 발을 딛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 외관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과거의 건축 양식을 보존하고 내부를 복원해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관광객이 상하이를 가면 꼭 들러야 할 유명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곳이어서 그런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임에도 전시관 내부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청사 유적지 1층과 2층에는 당시 임시정부의 집무실과 요인들의 생활 모습을 복원, 전시해 놓고 있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복원 돼 있다
3층에서는 임시정부 수립부터 환국까지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들을 전시돼있다.
집무실에 복원된 김구 선생의 젊었을 적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좁디 좁은 공간, 두 명이 오르내리기도 힘든 좁은 계단 등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실제로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청사 가옥세가 불과 30원, 고용인 월급이 20원을 넘지 않았으니 집세 문제로 집주인에게 종종 소송을 당하였다”고 회고한다.
그만큼 어려웠던 재정 상태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을 견디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던 선조들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삐걱거리는 좁은 계단을 올라 3층에 들어섰다. 하지만 3층 입구에 상주하는 중국인 직원은 이곳으로 들어서는 관광객들의 접근을 제지하며 통제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을 품고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다. 직원은 “비가 오는 날씨라 신발에 묻은 진흙이나 물기로 인해 전시 자료가 훼손될 수 있어 신발을 그대로 신고 입장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신발을 감싸는 비닐봉지를 건넸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인근에는 신천지(新天地) 등 대형 쇼핑몰이 있고, 사람들이 늘 붐비고 지하철역 또한 가깝다. 그만큼 땅값도 비싸고 개발에 대한 욕심도 있을 텐데,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숙소가 있던 영경방
자국의 역사도 아닌 타국의 역사 유적지를 보호 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렇듯 세심하게 관리 해주는 중국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3층에 전시된 임시정부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하나하나 확인한 뒤 이곳을 떠났다.
신천지 인근에는 '중공 1차 전국대표대회 구지'가 있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최초로 생긴 곳이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신천지(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라는 지명 인근에 한중 정부가 수립된 근원지가 이웃하고 있어 상당히 이채로웠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에 걸어서 5분여를 이동하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숙소였던 영경방이 있다. 영경방은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유일하게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인 최준례 여사가 크게 다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 등으로 문병과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상하이 도심 외곽에 위치한 루쉰 공원(그 아래 홍커우 공원이라는 옛 명칭 또한 적혀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 속 사실의 장소를 직접 확인 할 수는 없었다.
건물 내부가 보존되지 못하고 개조돼 음식점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상하이 도심 외곽에 위치한 루쉰(노신) 공원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 속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과거 홍커우(홍구) 공원으로 불렸고,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군부와 정관계 수뇌부 7명을 처단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100만 인민이 하지 못했던 일을 조선 청년 1명이 해냈다" 당시 국민당 수반 장개석(장제스)의 말처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당시 중국 국민당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놀라워했고 항일에 대한 의지를 담아 임시정부에 지지를 이어간다.
루쉰 공원 안내도. 가운데 매원이라는 한글 표시의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 보인다.
루쉰 공원은 우리나라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산책하고 운동하는 주변 현지인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공원 중심에는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이 있다.
루쉰 공원 안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 ‘매헌(梅軒)’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윤봉길 의사 생애 사적 전시관은 ‘매원(梅園)’이라는 화원 안에 위치해있다. 과거에는 이곳 매헌을 매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매원 안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 꽃
매화꽃이 꽃을 틔운 매원에는 윤봉길 의거 현장 표지석을 찾아 볼 수 있고, 매헌에 들어서면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관련한 일화와 수통 폭탄 등 재현된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윤봉길 의거 현장 표지석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이곳 또한 중국 정부의 세심한 관리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루쉰 공원 입구에서부터 매원까지 쉽게 찾아올 수 있는 한글 이정표, 매헌에서 재생되는 윤봉길 의사 의거 관련 영상과 한글 자료들, 문이 닫혀 있긴 했지만 매원 안에 위치한 한글로 된 기념품 판매점까지.. 중국 정부가 항일 투쟁에 대한 윤봉길 의사의 의기를 높이 사서 그런 것일까?
다시금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업적에 감사를 드리며 매헌 정중앙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흉상에 짧은 목례를 한 뒤 이곳을 떠났다.
매헌 안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 흉상
송경령 능원 입구
이번에 찾은 곳은 임시정부와 관련한 유적지가 아니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던 여인. 바로 송경령(쑹칭링)이 묻힌 무덤이다.
송경령이 누굴까? 송경령은 손문(쑨원)의 부인이며 장제스의 부인인 송미령(쑹메이링)의 언니다. 남편인 손문의 사후 송경령은 공산당 쪽에 섰고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부주석을 맡게 된다.
등소평이 쓴 송경령 능원 표지석
송경령은 자신이 죽게 되면 부모님이 묻혀있는 상하이 조계지에 있는 ‘만국공묘’에 묻어달라고 했다.
송경령이 ‘만국공묘’에 묻힌 뒤 이곳은 송경령능원으로 개칭되고 기념관이 지어졌다.
지금 찾아가는 곳은 송경령능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만국공묘’다. 그곳에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의 흔적이 있다.
송경령 능원 내에 위치한 만국공묘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를 거치며 요인들도 함께 늙어갔다. 급작스런 피난생활과 환국 등 급박한 상황 속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이곳에 묻혔다.
김인전 선생 묘지
노백린 선생 묘지
김인전, 노백린, 신규식, 박은식, 연병환 선생 등이 묻혀있다. 다행인 것은 90년대 이후 이분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1월 김태연 지사의 유해까지 고국 품으로 돌아오기로 결정됐다.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순국 선열들께 목례를 올리고 자리를 떴다.
이외에도 상하이에는 인성학교터, 모이당, 삼일당 등 임시정부 관련 활동처가 많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들에서는 현재 임시정부와 관련된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인성학교 터로 추정되는 곳
모이당
삼일당 터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은 거세졌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해 정착할 때까지 8년 간 고난과 역경의 유랑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임시정부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바로 항저우(항주)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 등을 피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은 자싱(가흥)에 피신 할 수 밖에 없었다. 항저우로 가기 전 먼저 김구 선생의 피난 생활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자싱의 매만가. 이곳은 화려하고 복잡한 상하이와는 다르게 전통 양식의 가옥이 줄지어 늘어선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호젓한 길을 지나 찾아간 곳은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 피난처다.
자싱 매만가 76호. 김구 선생 피난처
자싱의 김구 선생 피난처 또한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보수를 거쳐 일반인에게 개방됐다.
미국인 목사 피치와 절강성장을 지낸 중국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무사히 빠져나간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여느 중국 가옥과 비슷한 구조인 이곳에서는 특별한 곳을 찾아 볼 수 있다. 김구 선생 침실 한 켠에 숨겨진 비상 탈출구가 그곳이다.
김구 선생 침실 모습
김구 선생 침실 한켠에 숨겨진 비상통로
2층 김구 선생의 침실 구석 바닥에는 엉성하게 짜여진 나무 판자가 있다. 이것을 들어내면 1층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는데, 김구 선생은 비상시에 이곳을 통해 집 뒤편 호숫가로 이동, 매여진 나룻배를 타고 피신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 선생 피난처 뒤편에 놓여진 나룻배. 원래는 배를 호수에 띄워놓았었는데, 부식 등 훼손 위험으로 어느 순간 육지에 거치시켜놓았다
원래는 이 비상 탈출구가 침대 밑에 있어 찾기가 어려웠는데,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침대의 위치를 옮겨놨다고 한다.
잔잔한 호수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일제의 눈을 피해 비상 탈출구 까지 설치, 이용해야 했던 김구 선생의 긴박했던 피난 생활이 얼마나 고됐을지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김구 선생 피난처에서 바라본 호수
특히나 가족과 헤어지고 외롭고 고단한 생활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불태웠을 김구 선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이 아련해졌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사용한 피난처인 일휘교 17호
김구 선생 피난처 인근에는 이동녕, 박찬익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의 숙소인 일휘교 17호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운 저보성의 큰아들 저봉장의 가족과 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은 일제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하이옌(해염)으로 이동했다. 저보성의 맏며느리인 주가예의 보호를 받으며 피신했는데 재청별장이 바로 그곳이다.
재청별장
당시 주가예의 친정이 소유했던 재청별장 또한 현재 중국 정부의 지원 아래 보호 유적지로 잘 보존, 복원 돼 있다. 하이옌의 외곽에 위치한 이곳은 남북호(南北湖)로 둘러싸여
풍광이 운치가 있고 호젓한 곳이다. 김구 선생은 이곳에서 탁트인 호수를 바라보며 그간 답답했을 피난 생활을 조금이나마 위로 했을지도 모른다.
재청별장 뒤편에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장군이 세운 기념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음수사원 한중우의(飮水思源 韓中友誼)'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물을 마실때 그 근원을 생각하듯 한국과 중국의 우정을 생각하자'는 뜻이다. 김구 선생의 피난을 도운 중국인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있다.
정말로 저보성과 그의 가족들이 없었다면, 임시정부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다시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김신 장군이 세운 비문. ‘음수사원 한중우의’라는 글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김구 선생도 백범일지에 주가예와 재청별장에 이르렀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며 감사를 표했다.
"저 씨 부인(주가예)은 굽 높은 신을 신고 7~8월 불볕더위에 손수건으로 땀을 씻으며 산 고개를 넘었다. 저 씨 부인의 친정 여자하인 하나가 내가 먹을 식료·육류품을 들고 우리를 수행하였다. 나는 우리 일행이 이렇게 산을 넘어가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생생하게 담아 영구 기념품으로 제작하여 만대 자손에게 전해줄 마음이 간절하였다.
자싱 임시정부 요인 숙소에 소개돼 있는 주가예
그러나 활동 사진기가 없는 당시 형편에서 어찌할 수 있으랴.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
김구 선생은 이 재청별장에서 반년 간의 피난 생활을 이어가다 다시 자싱으로 이동하게 된다.
자싱에 도착한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선상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은 당시의 고된 피난생활을 읊조리듯 백범일지에 "오늘은 남문 호수에서 자고 내일은 북문 강변에서 자고 낮에는 땅 위에서 행보나 할 뿐이었다"며 회고했다.
이 당시 외로웠을 김구 선생을 옆에서 지켜준 조력자가 있다.
선상생활을 함께 했던 여성 뱃사공 주애보가 그 주인공이다.
자싱 임시정부 요인 숙소에 소개된 주애보
김구 선생은 이곳 자싱에서 외롭디 외로웠을 피난 생활을 그녀와 함께 버텨냈을 것이다.
항저우(항주)에는 현재 임시정부 청사 사적지 2곳과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등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항저우에 있었지만 임시의정원 회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싱이나 난징(남경) 등지에서 개최됐다.
항저우에 도착한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청사로 사용한 것은 청태 제2여사였다. 이후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 23호에 청사를 마련했는데, 이곳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구지(옛 지역)다.
이곳 또한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전시관으로 개보수 돼 일반인에 개방돼 있으며, 임시정부 역사와 관련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
조선족 해설가의 한글 설명 속 전시관을 둘러보면 우리나라의 여느 기념관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먼 타국에서 우리나라 역사 속 위인에 대한 설명을 현지인에게 들으니 남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1935년 11월 임시정부는 전장(진강)으로 근거를 옮겼다.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과 좀더 가까운 곳으로 이동해 수월하게 교섭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현재는 회족(이슬람계 소수민족)이 다수 살고 있는 전장에서의 임시정부 유적지는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장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 가는 길
다만, 김구 선생이 '항일에 대한 내용'으로 강연을 한 것으로 알려진 목원소학교 부지에 전장에서의 임시정부 사료를 모아, 전시해 놓은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이 위치해 있다.
중국에서 찾기 힘든 또 다른 이국적인 형태의 가옥들 안에서 찾은 임시정부의 흔적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전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 정문. 우측에 보이는 단층짜리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에 들어서자 김구 선생 흉상과 함께 이곳에서의 임시정부 활동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전장 임시정부 사료 진열관에 들어서자 보이는 김구 선생 흉상
전장에 이어 찾은 난징은 임시정부 유적지는 없지만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김구 선생은 자싱에서의 선상생활을 마치고 난징으로 이동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장 부부 생활을 한다.
이때 부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앞서 언급했던 주애보다.
김구 선생은 난징에 있는 회청교에서 고물상 행세를 하며 일제의 눈을 피했다. 다시금 찾아 본 회청교에는 그 때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회청교를 둘러보며 고물상으로 위장한 김구 선생의 모습을 가슴에 담았다.
이어 김구 선생이 한인청년들을 모집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목적으로 교육을 실시했던 한인 학생훈련소 사무소가 있던 곳인 동관두를 찾았지만, 이곳 역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회청교
동관두 터
난징시 외곽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황룡산 중턱 건물들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산 속을 오르다 보면 천녕사를 찾을 수 있다.
안내표지도 없고 길 또한 험해 찾기 어려운 곳이지만 이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독립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천녕사 팻말
천녕사 터 위에 세워진 건물
폐허가 된 천녕사
이역만리 타국의 깊은 산속, 자주 독립을 열망하며 피와 땀을 흘렸을 선조들의 모습이 떠오르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듯 이 곳은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들이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다. 폐가처럼 남아 있는 이 건물이 과거 조선 청년들이 훈련하고 생활했던 터전은 아니라고 한다.
폐허가 된 천녕사 터 내부에 놓여진 무궁화
과거 중국 정부가 천녕사 터를 다른 목적으로 복원했고 현재는 그 건물조차 폐허가 돼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천녕사 터 입구에 남아있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 나무는 이곳에서 훈련을 받으며 피와 땀을 흘린 조선 청년들의 기상을 알리듯 굳건히 서 있었다.
폐허가 된 곳을 둘러보니 이곳을 찾은 한국인이 놓고 간 듯 놓여진 무궁화 꽃이 보였다. 이 꽃이 피와 땀을 흘리며 독립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넋을 조금이나마 달래줬을 것이다.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요인들도 곧장 난징을 탈출하게 되는데 이후 자리잡은 곳이 창사(장사)다.
난징을 탈출한 임시정부가 창사부터 종착지인 충칭에 도착하기까지 머물렀던 도시는 4곳(창사->광저우(광주)->류저우(유주)->치장(기강))인데 머문 기간은 채 3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짧게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창사에서도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곳으로 알려진 서원북리에서도 정확한 청사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서원북리에 청사가 위치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
임시정부의 활동 장소로 알려졌고, 김구 선생이 피격 당했던 남목청 역시 그 흔적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찾아가는 길 곳곳 건물들이 개발을 위해 허물어져 있었고, 안내 표지 또한 찾기가 어려웠다.
남목청 찾아 가는 길 곳곳에 보이는 재개발 준비 중인 건물
어렵사리 찾은 남목청은 현재 아쉽게도 내부 보수 중이라며 굳게 문이 닫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주위를 둘러 살펴보니 아직 개발의 손이 닿지는 않은 듯 주변은 옛날 모습 그대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굳게 닫혀있는 남목청
다행히 남목청은 내부 보수를 한 뒤 다시 개방한다고 한다.
남목청 이후에 찾은 곳은 상아의원이다. 김구 선생이 피격을 당한 뒤 이송 된 곳으로 알려져있는 곳이다.
당시 의사들이 김구 선생이 죽을 것이라 여겨 치료를 하지 않았지만 서너시간 후에도 살아 있자 뒤늦게 희망을 갖고 치료해 살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상아의원은 중남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돼 있는데 이곳 역시 내부 보수중이라 관계자가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의 목숨을 살린 상아의원 밖에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의를 표하고 창사를 떠났다.
상아의원
창사에 이어 찾은 곳은 광저우다. 광저우 또한 임시정부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언급된 '동산백원'이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됐는데,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이 유적지가 최근에야 남아있는 곳으로 확인됐다. 광저우시 휼고원로(恤孤院路) 12호에 위치해 있는 건물이 바로 그곳이다.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로 확인된 동산백원
이곳은 지금도 현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기우뚱 서 있는 나무와 오래된 건축 양식의 건물을 보면 그 긴 세월을 느낄 수 있다.
휼고원로 지명과 관련 현지 관계자는 "과거에 외국인 신부들이 고아들을 모아 생활했던 고아원이 있던 곳"이라면서 "이후 외국인들의 투자가 많이 이어져 발전한 광저우 대표적인 부촌"이라고 설명했다.
상하이 만큼 발전한 도시인 광저우, 그리고 그 광저우 안 부촌이라고 알려진 이곳에 아직까지 과거 건축물로 남아있는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보니 이색적이었다.
광저우 임시정부 청사 건물 내부 모습
동산백원과 멀지 않은 곳에 중국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구지가 있다. 당시 이곳에서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상하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광저우에서도 우리나라 임시정부 이웃에 중국 근현대사 속 역사적 사건이 겹쳐 있었다.
광저우를 가로지르는 주강 안 황포섬에 위치한 황포군관학교는 중국 최초의 현대식 군관학교다. 이곳은 현재 해군부대가 주둔해 있고, 강 위에는 군함이 정박해 있어 현재까지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황포군관학교 정문 모습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국공합작 이후 소련의 지원 속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같이 참여해 지어졌는데, 당시 조선 청년들의 입교도 허락됐다.
이곳에서도 자주독립의 열망을 품은 수 많은 조선 청년들이 피와 땀을 흘렸다.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서지 못하고 중국의 내전에 희생됐던 청년들도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인근에 위치한 동정진망열사묘는 광저우 군벌인 진형명의 난을 제압하기 위해 벌인 전투에서 사망한 황포군관학교 재학생들의 시신을 안치한 묘지다.
이곳 가장 안쪽에 두명의 조선 청년이 잠들어있다. 황포군관학교 6기생 동기인 김근제와 안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투에서 사망한 황포군관학교 재학생 및 예비 입학생들이 묻힌 무덤. 이곳에 조선 청년인 김근제와 안태가 있다
학생들의 묘비가 세워진 곳에 함께 위치한 이 두 명의 조선 청년 묘비에는 한국인임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외에 이 두 청년의 자세한 내력은 찾기 어려웠지만, 조국 독립의 열망을 품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드높인 조선인의 기개는 선명하게 남아있는 듯 보였다.
이곳 동정진망열사묘 구석 한켠에는 색바랜 비석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그 비석에는 '정기장존(정의로운 기개는 길게 보존된다)'라는 문구가 써져 있다.
'정기장존'이 써있는 비석
이 비석의 문구처럼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타국에서 스러져간 조선 청년들의 기개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름답게 꼿꼿이 보존되어 가고 있었다.
광저우를 떠나 찾은 류저우(유주) 역시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중 임시정부 요인들이 류저우에서 잠시 머물렀던 곳인 낙군사는 류저우에 있는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흔적이다. 노란색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로 건축된 이 건물은 류저우시 정부와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에서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으로 꾸몄다.
류저우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진열관(낙군사). 아쉽게도 이곳도 내부 보수 중이라며 개방을 하지 않고 있다
낙군사 외벽 안내판에는 이곳의 내력과 함께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43년 당시 베트남 독립운동을 준비했던 호치민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요인들이 이곳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머물렀다는 점이 이채로웠다.
류저우에서는 또 한국광복진선청년대가 활동했다. 전면에 나서 전투부대로 항일투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중국인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통해 투쟁을 이어갔다.
이들이 중국 부상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공연을 펼쳤던 장소인 배신로 68호와, 임시정부를 따라 치장으로 이동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던 유후공원에서는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답사 막바지에 이르러 도착한 치장. 이곳에 위치한 임시정부 유적지에서는 충격적인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상하이부터 류저우까지 그간 찾아본 임시정부의 유적지들은 잘 보존되거나, 혹은 아예 흔적 조차 사라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견한 임시정부의 흔적은 '사라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유적지였다. 조금만 더 관심과 지원이 있다면 보존될 수 있는 유적지가 현재 위태로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치장에서의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됐던 곳은 현재 위치를 추정만 할 뿐 흔적이 남아있지 않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보니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이동녕 선생이 살았던 곳이 바로 그렇다. 다른 요인들과 가족들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이미 없어졌지만, 이동녕 선생의 거처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었다.
치장 이동녕 선생 거처 터
양쪽에 지어진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남아있는 이동녕 선생 거처는 그야말로 스러지기 직전인 폐가 모습 그 자체였다.
그나마 집 벽에 '한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구거지'라는 안내판을 통해 이 곳이 임시정부 유적지임을 알아볼 뿐 언제고 철거될 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한평생 싸워나갔지만,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곳 치장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동녕 선생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우리가, 정부가 관심을 기울이면 보존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사라져가는 모습을 목도하니 안타까운 마음 또한 컸다.
이동녕 선생의 거처를 확인한 뒤 취재를 통해 이동녕 선생의 묘지로 알려진 곳을 찾았다. 현재는 유치원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최근까지 이곳 한편에 묘비가 남아 있어 이동녕 선생 묘지라고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동녕 선생 묘지가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치원 터. 현재는 아무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가 본 그 곳에서는 그 묘비조차 사라져 있었다. 이동녕 선생 묘지였던 역사적 장소가 사라진 것이다. 유치원 관계자에게 묘비의 행방을 물어보니 "모른다"는 대답만 공허하게 돌아왔다.
기나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 그 임시정부의 가족들은 충칭 외곽에 있는 토교에 뿌리내렸다.
재정적 어려움은 남아있었지만 국민당의 원조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이곳에서 비교적 평범한 일상을 살게 됐다.
충칭 철강공장 안에 위치해 있는 토교 한인촌은 현재 집터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세 채의 집이 지어진 터와 함께 '한인 거주 옛터'라고 적혀진 비석이 남아있다.
토교 한인촌 근처에 세워진 비석
오랜 피난 생활을 끝내고 밭을 일구며 소중한 생활을 보냈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세채의 기와집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주 터
하지만 이 곳도 철강공장의 이주와 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현지 관계자는 전했다. 이곳의 보존 역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숙제였다.
토교 한인촌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화상산 한인 묘지터다. 이곳 역시 정확한 안내표지 등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다.
화상산 한인 묘지 터로 추정되는 곳
어렵게 찾은 이곳 역시 중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묻혔던 묘지 터라는 역사적 사실만 남아있고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도 이곳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 이들의 유해는 김신 장군이 국내로 모시고 왔다.
해방을 앞두고 머나먼 타국에 묻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에 짧게나마 묵념을 표하고 마지막 장소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총 4곳의 청사를 사용했다. 양유가, 석판가와 오사야항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연화지가 그곳이다.
양유가와 석판가에서 사용했던 청사 건물은 일본의 폭격 등으로 인해 현재는 사라진 상태다. 오사야항 또한 최근까지는 비석으로 그 위치를 가늠했는데, 현재는 개발로 인해 그 비석조차 사라지고 공사장으로 변했다.
오사야항으로 추정되는 곳. 과거엔 비석이 있었지만 현재는 비석조차 사라졌다
오사야항에서 5분여를 걸어가자 낯익은 정문이 눈에 띄었다.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동안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현판을 걸고 활동했던 연화지 38호가 그곳이다.
충칭의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연화지 38호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중 가장 큰 규모인 이곳에는 다섯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각 건물에는 외교부, 재무부 등 정부의 각 부처별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전시실에는 그간의 임시정부의 역사와 함께 충칭에서의 활동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고난과 역경의 역사를 딛고 하나의 정부로써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이곳을 찾으며, 충칭 임시정부 시절을 기리고 계단 앞에서 환국 환송 사진을 재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이곳 임시정부 유적지 또한 아직 완전하게 개방된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많은 양의 자료가 보관실 안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충칭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만난 현지 관계자는 “이 곳 임시정부의 약 60% 정도의 자료가 아직 미공개 상태”라고 설명했다.
보안 문제, 한중 양국 간 협의 문제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루 빨리 이러한 자료들이 공개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의 업적을 기록하고 후세에까지 널리 전달하기 위해 확실히 보존해야 한다.
임시정부 100년을 맞아 돌아 본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되짚어 가며 찾아 본 그 흔적은 후손들인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한민족이란 말이 무색하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분열된 현재의 우리 사회에 임시정부 큰 어른은 과거에 이미 경종을 울린 바 있다.
치장에서 병사하신 이동녕 선생이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당부하며 남긴 말인 '대동단결(大同團結)'이 바로 그것이다.
이동녕 선생이 바랐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단결해 독립운동을 감행했던 순국 선열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헌신과 발자취를 기록, 보존해 후세에까지 전해야 할 것이다.
2월 23일 마지막 종착지인 충칭 임시정부 계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취재진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