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중심 미술사에서 배제된 여성화가·여성관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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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협동조합 두잉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
3강 '여성들의 도전'_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지난 17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열린 두잉 사회적협동조합 '2020년 2월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에서 ‘여성들의 도전’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최영주 기자)

 

각종 미디어에서 여성은 '재현(再現)'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현'이란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다시 나타남'을 의미한다. 매스미디어 등장 이전, '보이는' 매체로서의 미술작품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여성을 재현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사회적협동조합 두잉이 마련한 '2020년 2월 연속특강-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을 통해 미술사를 중심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응시의 권력'에 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18세기 초상화, 21세기 미디어…'응시 권력 속 여성"
② '누드' 향한 시선…'섹슈얼'한 여성, '숭고'한 남성
③ 남성중심 미술사에서 배제된 여성화가·여성 관람자"
(끝)


'핑크 튤립'(1926)과 같은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을 두고, '꽃'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오키프는 자신의 작품이 가진 의미를 좁힐 위험이 있다며 이러한 해석을 경계한다. 작품을 만드는 주체뿐 아니라 보는 주체의 성별에 따라서 차별적 해석이 생겨난다. 남성이 가진 응시의 권력 속 여성은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열린 두잉 사회적협동조합 '2020년 2월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 3강 '여성들의 도전'에서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는 '여성 작가와 여성 관람자의 복원'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떤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작품에서 재현할 수 있는 세상도 달라진다. '본다'는 것조차 권력이 된 시대에서 여성이 그려낼 수 있는 세상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여성은 보는 '주체'가 아닌 보는 '대상'이었고, 보는 주체가 된다 해도 남성들이 보는 세상을 볼 수 없었다.

이라영 연구자는 "인상주의 남성 작가들이 포착한 세계와 여성 작가들이 포착한 세계는 차이가 있다. 서로가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메리 카사트의 '조는 아이를 씻기는 어머니'(1880)나 '침대에서의 아침'(1897)에서 보듯이 인상주의 여성이 보여주는 소재와 공간이 '집 안'인 경우가 많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

 


베르트 모리조의 ‘발코니의 여자와 아이’(1872).

 


베르트 모리조의 '발코니의 여자와 아이'(1872)와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만 봐도 여성과 남성이 보고 재현하는 세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남성인 마네와 비슷한 계층의 여성인 모리조는 마네처럼 술집에 가서 여성의 모습을 그릴 수 없었다. 여성이 갈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됐기 때문이다. 여성은 교육도, 노동도, 갈 수 있는 공간에서도 차별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150여 년이 지난 2020년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연구자는 "신도시의 풍경이 모리조의 그림과 비슷하다. 젊은 남성은 직장을 다니고 여성은 아이를 키운다. 지금도 역할이 분담돼 있다"며 "인상주의 시대에도 여성은 사적 영역으로 몰아가고, 여성 작가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은 한계가 많았다. 이에 인상주의 시대 남성 화가가 그린 그림과 여성이 그린 그림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차별의 역사에서 여성은 '뮤즈'(muse·작가·화가 등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미술사의 변두리에 놓이게 된다.

까미유 끌로델은 흔히 오귀스트 로댕의 연인이자 ‘뮤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의 뮤즈 이전에 '성숙'(1893~1913), '왈츠'(1905) 등으로 유명한 조각가다. 이처럼 남성 작가의 '뮤즈'로 대표되는 여성 작가들은 작가보다는 남성 작가의 애인으로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연구자는 "여성 예술가든 지식인이든, 역사를 남성에서 벗어나 보려면 그 남자 옆에 있는 여성을 보라는 말이 있다"며 "뮤즈를 중심으로 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뮤즈라고 알고 있던 여성들이 실제로는 작가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웬 존의 '파리, 미술가의 방 한구석'(1909)도 로댕과 그웬 존의 남동생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품이다. 작품은 그웬 존 사후에 '재발견'됐다.

까미유 끌로델의 '성숙'(1893~1913).

 

이 연구자는 "모두가 합세해서 차별적 역사를 만든 것"이라며 "역사가들이 차별적인 시선으로 개입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관람자 역시 차별적 시선으로 보는 것들이 쌓여서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여성이 시각예술에서 싸운다는 것은 보는 문제를 갖고 싸우는 것"이라며 "오늘날 '불법 촬영'처럼 여성은 여전히 보는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시각예술에서 응시의 권력이라는 건 예술의 담론만이 아니라 정치적 담론으로 확장하기 좋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이 연구자는 여성 작가와 여성 관람자의 복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술사에서 여성 배제는 여성 '주체'의 배제와도 같다. 남성 작가 주체의 경험과 가치를 재현한 남성적 작품에 대한 남성 관람자(또는 비평가, 미술사가) 주체의 경험과 가치를 기술한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여성은 남성 주체의 응시대상인 '이미지'로 등장했다.

이 연구자는 "여성이 미술 작품을 소비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없기에 지속해서 남성 관람자 중심의 작품이 생산됐다"며 "'남성 주체-여성 대상'의 위계를 넘어 여성 주체를 복원하는 일이 미술사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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