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 발견 120년, 비밀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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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허 궁궐 종묘 유적에서 출토된 갑골문(사진=인민화보 제공)

 

"은허(殷墟) 갑골문의 중대한 발견은 중화문명, 더 나가 인류문명 발전사에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갑골문은 지금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성숙한 문자 체계로 한자의 기원이자 중화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의 뿌리다. 보다 중요시 여기고 전승 발전시킬 가치가 있다" -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갑골문이란 귀갑과 동물 뼈에 새긴 문자로, 주로 허난(河南)성 안양(安陽)시 샤오툰(小屯)촌 일대의 은허(殷墟)에서 발견됐다. 상(商)나라 후기(BC 14-11세기) 왕실과 귀족이 점을 치거나 기록한 문서다. 계문(契文), 갑골각사(甲骨刻辭), 복사(卜辭)라고도 한다.

갑골 하나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120년 전, 중국 근대 금석학자 왕이룽(王懿榮)은 오랫동안 약재로 이용해 온, 귀갑이나 동물 뼈에 새겨진 부호가 고대 문자라며, 갑골문이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고 단언했다.

갑골문은 3천여년전 상왕조의 사회 생활상을 환원시켰을 뿐 아니라 중국 정신과 중국 신앙의 기원을 담고 있으며 중국 전통문화의 특징과 품격을 갖고 있다. 갑골문 발견 120주년을 맞아 갑골문과 관련된 놀라운 과거를 더듬고, 상고 시대의 필치로 기록된 역사의 진상을 환원하며, 역대 학자들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수천 년 동안 녹슬지 않은 중화문명 유전자의 비밀을 파헤쳐 보려고 한다.

◇ 한 왕조의 뒷모습을 보다

허난성 안양시에 위치한 은허는 갑골문의 고향으로 중국 상나라 후기의 도읍이었다. 3000년 전 상나라 왕 반경(盤庚)은 은허로 천도했고 은허는 상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254년 동안 8대 12왕을 거쳤다. 은허는 서주(西周)에 의해 멸망한 이후 폐허가 됐고 이 때문에 '은허'라는 이름이 생겼다.

은허 면적은 약 36㎢로 환허(洹河) 양쪽에 걸쳐 있다. 현재 은허는 현대화된 시설들이 많지 않고 녹지에 상나라 건축을 본뜬 건물이 몇 개 있을 뿐이다. 삼삼오오 짝지어 있는 관람객이 아니라면 이곳이 수천 년 문화의 보고이자 역사의 변천이 묻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과학적 발굴을 거쳐 후기 상나라 궁궐의 종묘, 왕릉, 환베이(洹北) 지역의 시장, 수공예 작업실 등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허 궁궐 종묘구에는 수많은 갑골 땅굴이 분포돼 있다. 1936년 발견된YH127 갑골 땅굴에서 글자가 새겨진 갑골 1만7000여 편이 출토됐다. 출토된 갑골은 내용이 매우 풍부해 제사, 사냥, 농업, 천문, 군사 등 상나라 사회상을 엿볼 수 있어 갑골문과 상나라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중국 고대 최초의 ‘문서 보관소’라고 불린다.(사진=인민화보 제공)

 

탕지건(唐際根) 은허 고고학팀 팀장이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은 3천여 년 전 도시 모습을 이렇게 '환원'시켜 주었다. "어렴풋이 상 왕조가 지하에서 깨어났다.상 왕 무정(武丁)과 왕후 부호(婦好)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점쟁이가 점을 치며, 사병이 훈련을 하고, 기일에 맞춰 제사가 진행된다. 궁궐 밖 사방으로 뻗은 도로에는 마차가 끊이지 않고, 번화한 거리에 행인들이 오간다.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인공 수로 남쪽에 있는 구리 주조 작업실에는 불꽃이 튄다…".

이렇게 낭만적인 상상이 가능한 이유는 역대 고고학자들이 3000년 전 상나라의 도읍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기 때문이다.

청동기, 죽간, 비단 등에 새긴 문자에 비해 갑골문은 발견이 제일 늦었지만 발견되자마자 중국 전통학자들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1928년 10월, 유명 고고학자인 둥쭤빈(董作賓)이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의 위임을 받아 안양을 방문해 처음으로 은허 유적지 발굴에 나섰다. 이후 고고학자들이 이곳에서 장장 10년 동안 15차례 발굴을 진행했다. 1936년 발견한 YH127호 갱에서 갑골 1만7096편이 출토됐다. 소 뼈 8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귀갑으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이다. 이 갑골은 상나라 무정 시기에 묻힌 것으로 상나라 왕실이 보존한 점술 문건이었다.

은허가 대대적으로 발굴되면서 오래된 왕조의 도성 유적과 찬란한 상나라 문화가 세상에 소개됐다. 은허박물관에는 3천여 년 전 청동예기, 식기, 주기, 병기, 옥기, 도구 등이 전시돼 있다. 갑골문은 주로 점술에 쓰였고 일부는 기록에 쓰였다. 갑골문은 역사의 직접적인 기록으로 후대인이 상나라의 사건과 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상 왕이 어떤 병에 걸리고 무슨 꿈을 꾸었고 어떤 사고를 겪었는지 등 '왕조의 뒷 모습'이 드러나면서 방대하고 오래되며 신비에 싸인 상 왕조가 보존된 문자에 의해 되살아났다.

중국문자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점술용 귀갑(사진=인민화보 제공)

 

◇ 문자는 근원으로 돌아온다

안양은 갑골문의 고향일 뿐 아니라 중국 고고학의 기점이기도 하다. 은허박물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안양사무소는 중국 국가 고고학 연구기관의 첫 번째 발굴지다. 역사 속 깊고 신비한 세계에 묻혀 있던 상 왕조를 세상에 선보인 동시에 이론과 방법, 기술 등 분야에서 중국 고고학의 역사와 전통을 형성했다.

2001년 은허 세계유산 신청의 바람을 타고 안양시는 '문자를 주제로 한 박물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2009년 11월 16일 중국문자박물관이 국가급 박물관으로 공식 개관했다. '문자귀소(文字歸巢)' 초대 관장이었던 펑치융(馮其庸) 관장은 중국문자박물관 설립을 이렇게 평가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체계가 있는 가장 최초의 한자인 갑골문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 인도의 인더스 문자와 함께 세계 4대 고문자로 불린다. 그러나 갑골문 만이 역사의 세월을 관통해 지금의 한자와 일맥상통하고, 쓰는 방식도 후세의 쓰기 습관 형성에 기초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우에서 좌로 쓰는 규칙은 후세까지 한자의 쓰기 방식이 됐다가 20세기 초에야 가로로 쓰는 방식으로 대체됐다.

갑골문은 중국인의 가치 인식, 사유방식, 심미관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글자는 중국 문화 전승의 상징이다. 은허 갑골문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것이지만 3천년 동안 한자 구조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전승이 진정한 중화 유전자다"라고 말했다.

안양시에 위치한 중국문자박물관은 현재 세계 유일의 ‘문자’를 주제로 한 박물관이다.(사진=인민화보 제공)

 

현재 글자가 새겨진 갑골은 15만편이 넘고 약 4500개의 글자가 있다. 국내 기관, 개인 소장품 외에 미국, 캐나다,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크고 작은 박물관과 연구기관, 공공 또는 사립 기관에서도 2만6천여 편의 갑골을 소장하고 있다.

갑골문은 중국인의 가치 인식, 사유방식, 심미관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전 인류 공동의 정신적 재산이다. 2017년 갑골문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이는 세계가 갑골문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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