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문이 열린다' 한해인, 유령이 돼서야 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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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인터뷰] '밤의 문이 열린다' 혜정 역 한해인 ①

지난 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밤의 문이 열린다' 혜정 역 배우 한해인을 만났다. (사진=황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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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무 살이 되고 나서 가장 좋았던 것은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더 이상 같이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몸을 누일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지만 독립해 얻은 방은 소중했다. 원래도 말이 없지만 일할 때는 더 말이 없다. 그저 하루하루 할 일을 해낼 뿐이다. 앞으로 사는 게 더 나아지리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 듯 보인다. 남의 이야기는 들어도 나를 드러내는 건 즐기지 않기에, 자기 말에 귀 기울여줄 누군가가 간절하지도 않다. 당연히 어떤 사람과 어느 정도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감독 유은정)에서 한해인이 맡은 혜정은 이런 인물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중심인물이라기보다는 배경에 가까운. 그 무엇에도 애착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혜정은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유령이 된다. 처음엔 그저 무섭고 기묘한 꿈이겠거니 하는 생각이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쳤을 때 얼얼하고, 볼을 꼬집었을 때 아픈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던 까닭이다.

조용하고 무기력한 사람.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것과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 하지만 한해인은 혜정이 아주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누구나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데, 혜정은 그게 극대화된 사람이라고 여겼다.

혜정은 유령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하루아침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게 됐는지 지나온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며, 진실에 다가가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유령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누가 내 말을 듣는지에 대해선 무관심했으나, 유일하게 자기 말을 들어주는 수양(감소현 분)에게 '제대로 말을 걸기 위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배우 한해인을 만났다. 한해인은 신비로운 존재인 '유령'을 연기하면서 일부러 새로운 특징을 덧대 혜정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관객들은 큰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혜정의 여정을 따라갈 수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오디션으로 혜정 역을 만나게 됐다. 어떤 준비를 했는지.

음, 그때 시나리오를 받아보고서 혜정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조용하고 좀 무기력하다고 느껴져서 강한 임팩트를 남기고 와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조금 편안하게 준비한 걸 보여드리려고 했다.

▶ 혜정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나.

음, 좀… 남 앞에 서는 걸 싫어하고 남들하고 같이 있을 때도 주목받기 싫어하고 '그냥 내 할 일만 잘 끝내자' 이렇게 생각하고, 무언가에 목표를 정해 살아가기보다는 정말 이 시스템에 잘 적응해서 평범하게 일만 잘 끝내자 하는 인물? 그리고 혼자 있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혼자 있을 땐 누워있는 걸 좋아하고. (웃음) 남들하고 대화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기 세상 속에서 갇혀 지내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하루아침에 유령이 되어버린 혜정이 하루하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되짚는 미스터리 판타지다. (사진=영화사 리듬앤블루스 제공)
▶ 친오빠의 연락을 받지 않는 장면과, 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도 되지 않아서 좋았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혜정은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사람인가.


네, 맞다.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할머니한테도 그렇게 큰 사랑을 받지 못했다. 가족과 있어도 이 사람들이 내 가족이야, 하기보다는 완전히 혼자라고 느끼면서 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하고도 연을 끊고 나 혼자서 편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다.

▶ 남들과 별로 소통하려고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생전 혜정이 고립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우스메이트나, 직장 동료들하고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같이 일하는 민성(이승찬 분)은 고백도 하지 않았나. 왜 민성이 혜정을 좋아하게 됐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고백을 받거나 하면 상상을 해 보기도 하지 않나. '내가 저 사람과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하고. 혜정은 그런 상상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먼저 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다. 보기에 잘 지내보긴 하지만, 항상 마음의 벽을 치고, 자신을 다 내보이지 않고 내 할 일만 한다. 민성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 같다. 왜 (나를) 좋아해 주는지도 모르겠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좋아한다는 고백을 받아도 당황스러움이 큰 상태인 거다.

▶ 혜정 성격과 닮은 점이 있나.

어느 면에서는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남들과 소통하는 게 어려울 것 같다, 내가 여기서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적응을 잘 못 할 거라는 생각. 혜정은 그게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고.

▶ 뒤로 갈수록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정적이고 착 가라앉은 인물을 연기하며 실제 일상에서도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촬영하면서는, 제 삶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그 상태가 잘 이해가 됐다. 정말 편하게, '나를 아무도 신경 안 써도 괜찮아' 하고 마음먹으니까 오히려 편하더라. 유령처럼 있으니까 오히려 편안한 게 있다. (웃음) 뭔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 혜정은 유령이 되고 나서 하루씩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 속 시간순서와 촬영 순서가 같지 않을 텐데, 혹시 혼란이 오지 않았나.

저도 그게 우려스러웠다. 과거 혜정의 시간만 정리하기도 하고, 유령의 시간만 정리하기도 하고, 둘을 합쳐서 나열하기도 했다. 혼란스러울까 봐 머릿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기억하려고 했다.

한해인은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으려고 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혜정 역을 연기했다. (사진=영화사 리듬앤블루스 제공)
▶ 극중에서 자고 일어난 줄 알았는데 유령이 되어버린 상황이 펼쳐진다. 유령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유령으로 변했을 때 제스처를 취해야 하나, 목소리 다르게 해야 하나, 걸음걸이 다르게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감독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살아있는 혜정의 모습 똑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혜정은 정말 살아있을 때 더 유령처럼 보이더라. 유령이 되고 나서야 삶에 대해 깨닫고, 마음을 열고 타인을 바라보게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 혜정은 죽기 전 도와달라고 하는 수양을 봤으나 두려움에 모른 체하고 떠난다. 그런데 유령이 되고 나서는 정반대의 상황을 맞이한다. 이런 설정을 어떻게 이해했나.

유령이 되고 나니 아무도 제 말을 듣지 못한다. (살아 있을 땐) 오히려 안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 나한테 관심 꺼 줬으면 좋겠다 했는데 죽고 나서야 그런 감정을 좀 알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누가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하고. 정말 외로움 속에 휩싸이게 된 그런 과정을 겪고, 수양이가 제 말을 듣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너무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을 것 같다. 제가 붙잡을 건 수양이밖에 없다. 혜정에게는 유일한 희망이다.

▶ 혜정은 차츰 수양과 마음을 터놓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유령이 되고 나서 훨씬 적극적으로 변했는데 그 동력은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너무나 당황스럽고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죽게 됐고 이 상황이 뭔지 호기심과 궁금증 하나로 움직이게 된 것 같다. 그러다가 수양이라는 캐릭터를 만나게 되는데, 수양이도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걸 목격하게 되지 않나. '아, 이렇게 죽게 되는구나' 하는 걸 발견하고 수양이란 아이를 찾아가게 되면서 자기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수양이는 굉장히 씩씩하게 지내고 있지 않나, 혼자 돌아다니면서. 타인을 위하는 마음은, 수양이를 통해서 시작하게 된 것 같다. 그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동질감을 통해 효연(전소니 분)과도 만나고.

효연은 혜정과는 다르게 욕망을 가진 인물로 나오는데, 혜정은 '이 인물은 뭘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뭔가 모르게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데 나와 연관 있을 것 같고. 효연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적극적이지 않나. 혜정은 그런 지점에 많이 자극받았을 것 같다, 효연한테. 효연이 혜정에게 '나도 내 삶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줬다고 본다. 혜정은 효연에게 자극을 받아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배우 한해인 (사진=황진환 기자)
▶ 효연의 정체를 알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어떤 감정을 갖고 연기했나.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얘는 누구길래 왜 나를? (웃음)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효연을 보고 분노해 먼지 같은 연기가 올라오는 장면도 있었다.

▶ 무기력한 혜정과 삶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효연은 정반대의 인물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저도 효연과 혜정을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혜정이 무기력하고 굉장히 수동적으로 살지만, 본인도 효연과 같은 욕구는 있다고 봤다. 그런 욕구를 실현해봤자 본인이 실망할 걸 알고 이미 선을 긋고 아예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거다. 굉장히 많은 방어벽을 치고 산 사람이, 자기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지고 나서야 자기를 발견해 방어벽을 깨부수고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라고 봤다. 효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욕망을 발견하기도 하고 계속 영향을 받는 거다.

▶ 영화에서는 확실히 나오지 않았지만, 혹시 혜정이 살아난다면 어쩔지 상상해 봤나.

물론 사람이 갑작스럽게 변할 순 없지만, (혜정이) 말을 먼저 건네기도 하고 자기 속내를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기했던 것 같다. 이런 순간들도 있구나, 정말 나 혼자가 아니라 나한테 영향을 주는 많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걸 알고 깨닫지 않을까. 삶이라는 게 항상 재미있을 순 없지만, 조금이라도 삶에 대해 (태도가) 열려서 잘 걸어갔으면 좋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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