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 30년 전에도 '구한말 타령'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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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갈등 없던 러시아도 ‘독도 도발’
한일갈등 중재 요청에 美 미온적
국력은 커졌는데 구한말 ‘데자뷰’ 반복
당사국으로서 ‘능동 외교’ 펼칠 때

지난 4월 북러 정상회담 취재차 방문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군항에선 매일 정오 실시되는 예포 발사와 국가 연주가 볼거리였다. 한때 동북아 해역을 위협하던 러시아 태평양함대사령부가 훤히 보이는 곳이다.

귀국 때 들른 블라디보스톡 공항에는 TU-95 전략폭격기들이 관광객의 사진 촬영에 무방비로 노출돼있었다. 최근 중·러 합동군사훈련에 동원됐을지 모를 그 비행기다.

냉전시대에는 외국인은 물론 자국민들의 접근도 엄격하게 제한했던 군사도시 블라디보스톡의 현재 모습이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의 KDIZ 및 독도 영공 침범 (그래픽=연합뉴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사건 때문에 떠오른 기억이다. 가장 큰 의문은 러시아가 왜 그랬을까 하는 점이다.

일반적 분석은 중·러가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맞서 한미일 3각안보를 시험하고 한반도 질서 재편에 앞서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 충분치 않다.

러시아 A-50 조기경보기는 중·러 폭격기 편대와 별도로 다른 시각에 다른 항로로 독도에 접근했다. 여기서 의문은 미국을 제외한 주변 4강중에 그나마 우리와 갈등이 적은 러시아가 뜬금없이 도발에 나선 배경이다. 중국이 아니고 말이다.

한러관계는 수교 30년 세월에 비해 발전이 느린 편이지만 그렇다고 불편한 사이는 아니다. 러시아는 극동·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한국과의 협력도 절실하다.

그런 러시아가 별 사전징후도 없이 영공 침범을 감행한 것도 모자라 오히려 우리를 비난한 것은 우리 외교의 아픈 곳이다.

북한과의 상시적 대치는 기본이고 중국과 일본까지 곳곳에 전선을 그어놓고 있는 판에 러시아마저 돌아선 것이다.

일본의 수출규제 핵심 품목인 불화수소를 놓고 러시아가 우호적 제스처를 취한 지 불과 10여일만의 반전이어서 더욱 어리둥절하다.

최근 주변국과의 갈등은 중층적, 복합적이다. 100년 전 구한말 상황을 보는 것 같다는 우려와 푸념, 탄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사실 ‘구한말 데자뷰’는 오래된 담론이다. 최소한 냉전 해체기인 199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목적과 의도에서 유포된 프레임이다.

냉전의 두꺼운 얼음 속에 갇혀있던 지정학적 역학관계가 꿈틀대자 ‘미국놈 믿지말고 소련놈에 속지말라. 조선사람 조심해라. 일본놈 일어선다’ 식의 피해의식이 발동했다.

예컨대 1990년 10월 당시 노재봉 대통령비서실장은 당정협의에서 “현재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정세가 구한말의 세력균형 상황과 유사하다”고 언급했다.

결국 ‘구한말’은 30년간이나 반복됐지만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상의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현 시점에서 ‘100년 전 구한말’이라고 하는 것부터가 어폐가 있다.

구한말은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부터를 말한다. 122년 전이다. 말이 구한말이지 열강이 조선을 침탈한 시점은 19세기 중반, 즉 최소 150년 전으로 올라간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뱉는 ‘구한말 타령’이란 게 얼마나 상투적인지 보여준다.

조르쥬 페르디난드 비고의 풍자화(1887년)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물고기(조선)를 노리고 있다.

 

물론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상 본질적으로 구한말 위기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긴 어렵다.

하지만 타성적, 교조적 해석을 접고 실사구시적 태도로 접근한다면 중대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사실 분단 상황을 고려하면 어쩌면 구한말보다 사정이 더 나쁠 수도 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분명한 것은 한국이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고, 그런데도 우리만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지난 2년여 북핵협상의 성취와 실패 속에서 얻을 교훈이 있다면 우리도 이제 당당한 당사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교체설이 나도는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방한 때 기대했던 한일갈등 중재에는 미온적인 채 호르무즈 파병 같은 ‘안보 청구서’만 내밀고 돌아갔다. 한미동맹이 결코 만능이 아님을 보여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한일갈등 중재를 요청한 문재인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내가 얼마나 많은 사안을 관여해야 하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 외교는 얄미울 정도로 영리하다. 미일동맹을 우리 이상으로 절대시하면서도 중국, 러시아, 심지어 북한에도 과감히 추파를 던지며 국익을 도모한다.

뭔가 피로감이 묻어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뉘앙스는 우리도 능동적 외교에 나설 때가 됐음을 알려준다.

신(新)남방 정책에 비해 다소 뒤쳐진 감이 있는 중국, 러시아와의 북방 축부터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에 관한 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러시아와는 우군으로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척지는 관계가 되면 곤란하다.

구한말과 비교할 계제는 아니지만 고종도 러시아를 이용했다. 최소한 못난 ‘구한말 타령’은 이제 그만 할 때가 됐다.

※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를 가감 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 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 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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