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서로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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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 칼럼]

지난 29일 저녁 국회에서 열린 사개특위 전체회의에서 공수처 법안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되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회의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펼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종종 식사를 같이하는 선배가 있다. 지난 목요일 저녁, 그가 식당에서 TV뉴스를 보다가 불쑥 내뱉은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서로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내전이나 다를 게 없어." 이어지는 말에서는 서글픔을 느꼈다. "이민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선배는 지난해 퇴직한 국가공무원 출신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가 했던 말이 지워지지 않았다. 감정이 섞인 직설이었지만 그의 주장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9년 대한민국은 총성 없는 내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맞다. 총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사생결단으로 상대 진영을 괴멸시키기 위해 혈안인 것도 옳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자조하듯 내뱉은 말은 어느 편을 지지하고, 지지하지 않고의 차원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그는 좌파와 우파가 갈라서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논쟁하는 나라는 비정상이라고 했다. 좌파와 우파가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전선을 확장해 세를 과시하는 것 역시 코미디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대학교수, 성직자, 과학자, 의사, 법조인, 예술인 등 전문가집단의 지식인들조차도 저마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을 위해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소속 의원들이 지난 26일 사법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가 열리는 국회 회의실 앞을 점거하고 이상민 사개특위 위원장 등 특위 위원들의 입장을 막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선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 그 중에서도 분단된 남쪽, 약 9만9천㎢ 크기의 작은 섬에 갇혀 70여년을 살다보니 정작 그 안에 사는 우리들의 모습만 보이기 때문일까. 문득 존 버거의 그림이 있는 산문집 <스모크>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올라 책을 찾아보았다.

"혹독한 추위가 닥치는 밤이면 서로 옹송그리며 모였다. 그렇게 역사에 대한 감각을 잃어갔다. 온 세상에 개와 얼음 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북극의 툰드라 지역에서 겪은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 세상에서는 개와 얼음 밖에 없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툰드라의 먼 지평선에서 연기가 하늘 위로 올라가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정신을 차린다. 사람이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2019년 대한민국 역시 개와 얼음 밖에 없는 툰드라에 갇혀 있는 꼴이다. 지평선 너머에서 한 줄기 연기가 올라가고 있음에도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다. 서로 싸우느라 연기가 보내오는 신호를 모른다. 저 너머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지나온 역사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탓이다.

지평선 너머 연기가 올라가는 곳에는 120여 년 전보다 더욱 강대해진 일본과 중국, 러시아, 미국이라는 열강이 있다. 그들은 한반도 남쪽에서 전개되는 좌파와 우파의 진흙탕 싸움을 TV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한반도 북쪽을 차지한 핵 보유국가 북한도 우리를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1894년 동학혁명 때도 그랬고 1950년 한국전쟁 때도 그랬듯 좌파와 우파는 서로를 벼랑 끝까지 밀어냈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무지막지하게 죽어나갔다. 이념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건만 결과는 비참했다. 동학혁명으로 패권을 차지한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36년을 통치했다. 이어서 벌어진 한국전쟁에서는 좌우가 결판을 보지 못하자 열강에 의해 남북으로 두 동강이가 났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선배가 식당에서 보였던 우울한 자조는 옛 비극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발로였다. 안을 들여다보면 다이너마이트로 청와대를 폭파하자는 우파의원, 그를 내란죄로 처벌하자는 좌파시민들, 시민들에게 물벼락 맞은 우파 정당대표, 패스트트랙으로 난장판이 된 뒤 휴업상태인 국회. 밖을 내다보면 우리에게 적국이나 다를바 없는 아베의 일본, 경제대국으로 굴기하는 시진핑의 중국, 부활을 노리는 푸틴의 러시아, 손해보고는 못사는 장사꾼 트럼프의 미국, 1년 5개월 만에 단거리 발사체를 쏜 핵보유국 김정은의 북한……

기분도 전환할 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그래도 얼마나 대단해요. 총을 안 들고도 잘 싸운다는 거요." 선배가 껄껄 웃더니 말한다. "하긴, 촛불 들고도 이겼으니까 희망이 있는 거지."

그렇게 위로를 주고받았지만 우리의 좌파와 우파는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부유해지는 동안 우리보다 몇 배나 더 강대해진 주변 열강들과는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가장 중요한 국가의 존망과 개인의 생존 문제는 어디로 간 것인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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