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머니 유해 위로 제주공항 비행기 뜨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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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기억과 추억 사이 ①]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14살 때 희생된 어머니…"70년 가까이 유해 수습 못한 채 제사"
산에 올라갔다는 이유로 총살된 아버지…지금껏 신원 확인 안돼
비행기의 굉음·무게 견디며 유해 수백구 여전히 활주로 밑에

글 싣는 순서
※제주 4.3 당시 수많은 사람이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죽어갔습니다. 제주 땅 곳곳이 이들의 무덤이 됐습니다. 현재 관광지로 변한 그 무덤엔 4.3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제주를 찾아 즐거운 추억을 남기지만 71년 전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CBS 노컷뉴스는 매주 한 차례씩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4.3 학살 터를 소개하며 아픔을 기억하겠습니다. 첫 회로 제주의 관문이자 4.3 당시 수백 명이 희생당한 제주국제공항 활주로를 유가족과 함께 찾았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오늘도 어머니 유해 위로 제주공항 비행기 뜨고 내린다
계속

강창옥(83)씨가 어머니 유해가 묻혀 있는 제주공항 활주로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강창옥(83)씨는 한동안 제주국제공항 활주로를 멀거니 바라봤다. 멀리서 비행기가 굉음을 울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괴로운 듯 뒤돌아섰다.

2일 오전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제주공항 활주로가 훤히 내다보이는 제주시 용담동의 한 공터에서 강씨를 만났다. 강씨는 "어머니 유해가 활주로 인근 어딘가에 암매장됐는데 70년 가까이 발견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한 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 14살 때 끌려간 어머니…"여태 유해 수습 못해"

강씨의 부모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4일 밤사이 예비검속으로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갔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제주 전역에서 '적색분자' 색출 명목으로 무고한 사람을 강제로 연행하고 처형했다.

"저녁쯤이었어요. 집(제주시 애월읍 하귀) 부엌에서 소 먹일 여물을 삶고 있었는데 경찰 2명이 어머니를 무턱대고 끌고 갔어요. 무서워서 울타리 뒤에 숨어서 보는데 경찰들이 어머니를 마구 때리면서 데려가더라고요."

강씨가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날 밤 장 공장 일 때문에 무근성(제주시 삼도동)에 생활하던 아버지도 함께 끌려갔다.

이후 아버지는 7월 15일 제주 앞바다에 수장됐고, 어머니는 8월 18일 당시 정뜨르비행장으로 불렸던 현 제주공항 활주로 인근에서 총살돼 암매장됐다. 어머니 뱃속엔 동생이 자라고 있었다. 강씨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강창옥씨가 취재진에게 4.3 당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아버지의 시신은 바닷속에 버려져 행방을 알 길이 없었지만, 어머니 시신은 비행장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당시 비행장을 군경이 지켜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8년 1월에는 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아 제주비행장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어머니 시신이 묻혀 있다고 들은 곳에 둔덕이 생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차츰차츰 가라앉더라고요. 나중에 활주로 확장 공사하고 나서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여태 시신도 못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효인지…."

강씨의 어머니와 함께 예비검속으로 제주경찰서에 갇혔던 500여 명이 현재까지 제주공항 활주로 인근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산에 올라갔다는 이유로 희생된 아버지

1일 자택에서 만난 송승문(70) 4.3희생자유족회장의 아버지 역시 1949년 불법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2일 비행장에서 총살돼 비밀리에 묻혔다.

1948년 가을 군경의 초토화 작전 당시 마을(제주시 오라동)과 집이 불에 타 산으로 피신한 게 원인이 됐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경찰서 습격 이후 군경이 중산간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불태워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산으로 피하신 건데 무장대의 근거지인 산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송승문(70) 4.3희생자유족회장이 1일 자택에서 4.3 당시 아버지가 희생된 사연을 얘기하고 있다. (사진=고상현 기자)

 

특히 1949년 봄 '산에서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군경의 선무공작에 안심하고 내려온 송씨의 아버지를 비롯한 중산간 주민 249명은 제대로 된 심리도 없이 진행된 불법 군사재판으로 비행장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2008년 공항에서 군사재판 희생자 유해 발굴을 진행했는데 수백 구가 나왔어요. 뼈들이 서로 엉켜 있고 겹겹이 쌓여 있었어요. 이것만 봐도 알아요. 군경이 아버지를 어떻게 죽인 거겠어요. 그냥 막 죽이고 구덩이에 쓸어 담고. 또 죽이고 쓸어 담고…." 송씨는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현재까지 공항에서 3차례에 걸쳐 유해 발굴을 벌인 결과 모두 380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120구만 신원이 확인됐다. 송씨의 아버지 유해는 아직까지 신원 확인이 못 이뤄져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2007년 당시 제주공항 4.3 유해발굴 현장. (사진=자료사진)

 

◇ 수백 명 묻힌 자리에 오늘도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4.3의 비극 이후 제주공항은 제주의 '얼굴'이 되어갔다. 4.3 당시엔 비포장 활주로만 있었던 비행장은 그동안 4차례에 걸친 활주로 확장 공사를 통해 현재 동서와 남북으로 긴 활주로를 갖춘 제주의 관문으로 거듭났다.

그 사이 일부 유해가 발굴됐지만, 아직까지 강씨의 어머니 유해를 비롯한 수백 구의 유해들은 두꺼운 콘크리트와 차디찬 흙 속에 파묻혀 있다.

현재 그 위로 1분 40초당 비행기가 뜨고 내리고, 하루 7만여 명이 활주로를 밟는다.

강씨는 인터뷰를 끝내며 제주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내릴 때마다 죄스러운 마음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인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수십 년 동안 안식을 찾지 못한 채 비행기의 굉음과 무게를 견디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자식으로서 괴롭습니다. 살아생전 어머니 유해를 꼭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강씨와 인터뷰를 끝낸 와중에도 비행기들이 굉음을 내며 제주공항 활주로에 뜨고 내렸다. 그 밑에 4.3의 아픔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주공항 로비 모습. (사진=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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