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전남 동부지역 '3.1운동의 힘' 항일운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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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 탄압 매산학교 폐쇄···기독교 학생들 3.1운동 결집 약해져
여수 윤형숙 열사· 고흥 신의구 선생 등 3.1운동 선두로

1919년 3.1운동 당시 학생신분으로 만세운동에 앞장 선 여수 출신 윤형숙 열사

 

1919년 최대 규모 민족운동인 3.1절이 100주년을 맞았다. 세계 YMCA 연맹 실행이사, 광주 YMCA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3.1운동 전수조사 전문위원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호남신학대학교 송인동 교수를 통해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특히 당시 전남 동부지역의 3.1운동 모습을 되돌아봤다.

기독교의 전례는 다른 종교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전에 동학이나 민족종교를 표방한 여러 세력들이 있었지만 정작 3.1만세 운동 기간 중 가장 조직적이고 만세운동을 국내외로 확산시키는데는 기독교 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일본 제국의 핵심부에 3.1만세운동의 의사를 전달한 이들은 기독교 인들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인도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송 교수는 "민족의식과 종교적인 신앙은 별개의 문제 같지만 한국에 개신교가 전례된 후 선교사들이나 교회에서 세운 학교, 교회마다 세운 야학 등을 통해서 당시 학교 근처에도 갈 수 없던 사람들이 학교를 통해 교사, 관리인, 독립운동가가 되면서 사회적 변혁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전제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라 재직회를 통해서 민주적인 토론 과정을 거쳤는데 이러한 민주적인 시스템이 3.1운동을 기반으로 확산되는데도 기독교인들의 주동적인 역할이 있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 보니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눈에 가시'였다. 때문에 당시 일본군들은 다른 종파에는 가하지 않은 가혹한 보복을 했는데, 교회당 12곳과 학교 8곳을 파괴했다.

송 교수는 "일본이 한일병탄 전에 전국적인 기독교 조직을 와해시켰고 특별히 호남지역의 의병들이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남한대투벌'이라는 기치를 내걸로 아주 가혹한 탄압을 했지만 일본의 의도와는 반대로 기독교는 더 강해져 전국 조직을 만들었다"며 "1914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만든 YMCA 전국조직이 그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3.1운동에 민첩하게 조직적으로 모여서 전국적인 확산에 기여한 것은 기독교 인"이라고 강조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고흥군은 故신의구 선생의 유족 신천우의 자택을 찾아 독립유공자 명패를 달았다(사진=고흥군)

 

3.1만세운동은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나 점차 남부지역으로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전남지역에서 3.1운동은 다른 지역보다는 규모가 적은 편이었다. 경남지역은 7만 명이 참여한 반면에 전남은 2,800여 명이 동참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남지역의 3.1운동 규모가 적은 이유로는 일본이 항일 의병 때 광주·전남지역의 의병을 탄압한 후 이 지역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특별히 헌병 경찰을 증원했다. 경남지역은 285개소, 광주·전남은 332개소로 경찰 현황에서 나타난다.

순천은 매산학교 등 미션스쿨이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것으로 짐작하지만 없었다.

1915년 일본이 기독교인을 두려워해 사립학교법을 만들어 종교 과목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그 뿌리를 없애기 위한 포고령을 내렸으며, 결국 매산학교는 폐교되면서 학생들의 결집력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8년 국가보훈처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의 독립운동자 수형자 수 5,323명 중 광주·전남의 운동가는 1,985명으로 37.3%를 차지했다.

송 교수의 전수조사에서에 따르면 전남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은 170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송 교수는 "전남 동부권이 한반도 역사에서 임진왜란 때부터 정말 소중한 곳"이라며 "3.1운동 당시 매산학교 폐교로 힘이 결집되지 못하고 분출되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줄기찬 항일 운동을 볼 때 비록 3.1운동 때는 움직임이 없었다 하더라고 그 에너지가 그 이후로 분출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남 동부지역에서 3.1운동 선두로는 여수시 화양면 출신 윤형숙 열사가 있다.

오원 선교사( C. C. Owen, 한국명 오기원)가 전남 광양에 교회를 세우고 여수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윤 열사는 선교사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광주 수피아 학교로 유학을 온 윤 열사는 3월10일 독립만세가 일어났을 때 태극기를 두르고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외치다 일본인에 의해 한 쪽 팔이 짤린다.

하지만 그는 남은 한 쪽팔로 태극기를 들고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 일본군을 놀라게 했으며 이 일은 다음 날은 3월 11일 조선 총독부를 통해서 일본 육군성에 긴급 전문으로 보고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으로 전해진다.

이는 윤 열사가 '전남의 유관순 열사'로 불리는 이유이다.

또 매산학교가 폐교되면서 1919년 3월 당시에는 큰 움직임이 없었지만 학교가 다시 복구 되면서 중요한 항일 운동이 일어났으며 고흥지역까지 독립운동의 기운이 퍼졌다.

故 신의구 선생은 만세운동 당일 각종 인쇄물을 배부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하다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또 고흥출신 목치숙 목사도 3.1운동 당시 고흥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전남지역 운동가들이 의식을 가지고 항거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호남지역 초기 선교사인 유진벨 선교사( Eugene Bell, 한국명 배유지)는 3.1운동과 일제의 잔혹한 행태에 대해서 본국에 보고했다. 또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선교사를 더 보내도록 부탁했다.

1983년 전남 목포 정명여고 선교사 사택 보수 공사 당시 천장에서 독립가, 3·1독립선언문, 2·8독립선언문, 격문 등의 문건들이 발견됐는데 당시 선교사들의 손을 통해서 중요한 문건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자체부터 의미 있는 일이다.

송 교수는 "이처럼 선교사를 통해서 3.1운동이 확산된 것 역사 중 밝혀지지 않은 사실이 많은데 특히 유진벨 선교사 등과 관련된 미발굴된 자료가 많다"며 "기독교 학계가 자료 발굴을 위해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송 교수는 "3.1운동과 현재는 100년의 거리가 있지만 현재의 동북아 정세 등 그때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며 "독립선언서를 다시 한번 다같이 읽으면서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세계 평화를 위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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