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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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의 함성①] 훈련장 가보니 사방이 절벽·숲
미국 OSS와 한인 공작원 잠입 '독수리 작전' 계획
가족들은 산나물 캐먹고 게 잡으며 근근이 버텨
"해방되는 날까지 피 흘리며 싸운 역사" 재평가

총을 들었고, 정세를 읽었다. 임시정부에 모인 선열들은 목숨을 내걸고 자주독립을 그렸다. 주권회복 과정이 일제 패망이라는 외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이유다. CBS노컷뉴스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충칭과 시안을 찾아 광복군의 피와 땀을 추적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광복군 '국내침투' 비밀 훈련장, 절벽에 메아리가 쳤다
(계속)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남쪽 중난산(終南山) 자락의 고찰 미퉈구쓰(弥陀古寺)에서 등산로를 따라 정상 쪽으로 600m쯤 올라간 곳.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미국 정보기관 전략첩보국 OSS가 합동으로 훈련했던 이곳을 지난 14일 찾았다. (사진=김광일 기자)

 

작전명 독수리 작전. 한국광복군은 해방 직전인 1945년 국내침투 비밀훈련을 감행했다. 미국 정보기관 CIA(중앙정보부)의 전신, OSS(전략첩보국)과 함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한반도 곳곳에 잠입시킨다는 계획이었다.

◇ 은폐된 훈련장…절벽과 수풀에 둘러싸여

CBS노컷뉴스 취재진은 지난 14일 비밀훈련장이 있던 곳을 직접 다녀왔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시내에서 남쪽으로 30km쯤 떨어진 중난산(終南山) 자락이었다.

대원들의 숙소로 사용됐다는 고찰 미퉈구쓰(弥陀古寺)에서 산 정상 쪽으로 600m쯤 올라가니 등산로 오른쪽에 땅이 움푹 파인 계곡이 나왔다. 폭은 최소 100m에서 최대 200m쯤. 이곳에 훈련장이 있었다는 건 기밀해제된 OSS 문건과 백범일지, 현지 증언 등을 근거로 추정되고 있다.

훈련장 위쪽에서 내려다 본 모습(사진=김형준 기자)

 

산세가 험했다. 사방은 가파른 절벽이나 수풀에 둘러싸여 있었다. 곳곳에 노출된 암석과 20m 높이 기암절벽도 눈에 띄었다. 외부에선 어떤 방향에서 봐도 안쪽을 볼 수 없는 구조였다. 훈련장은 보안을 위해 은폐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조금만 소리를 크게 내도 메아리가 쳤다. 70년 전 대원들의 기합 소리도 같은 방식으로 울렸을 것이다. 아울러 2월 중순인데 응달이 져서 눈이 녹지 않은 모습도 볼 수가 있었다. 다만 훈련은 5월 초부터 8월 초까지 진행됐기 때문에 대원들은 추위보다는 무더위와 싸워야 했을 것으로 보인다.

◇ 사격·폭파·로프하강 등 게릴라 훈련

광복군 대원들과 OSS 교관들이 함께 찍었던 사진(사진=독립기념관 제공)

 

70년 전 이곳에서 대원들은 싸전트 소령 등 미군 교관 20여명에게 사격과 교량 폭파, 강 건너는 기술 등 야전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또 밧줄을 타고 절벽 아래로 내려가 나뭇잎을 따거나 식사 중 폭약을 터뜨려 놀라게 하는 게릴라 전술훈련도 이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무전 교신, 지도 읽기, 심리전술을 비롯한 학과별 수업의 경우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진행됐다. 비밀 훈련장에서 10km쯤 떨어진 곳이다. 지금은 시안 창안구(長安區) 두취진(杜曲鎭) 소재로, 양식창고 건물이 들어서 있다.

근처에 마련된 2지대 기념공원에서는 광복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공원과 기념비를 관리하는 광복군 후손 자오성린(趙生林·72)씨를 만났다. 그는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없지만, 한국으로 떠나신 부모님이 이곳에서 광복군으로 활동했다고 들었다"며 "아버지는 이씨 성을 갖고 계셨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창안구(長安區) 두취진(杜曲鎭)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공원에서 공원과 기념비를 관리하는 광복군 후손 자오성린(趙生林·72)씨(사진=김광일 기자)

 

이처럼 훈련 당시에는 광복군 가족들도 희생과 헌신을 감수해야 했다. 산나물을 캐 먹거나 개울가에서 게를 잡아먹으며 근근이 버틴 것으로 전해졌다. 이 무렵 시안에 있던 2지대 소속 광복군은 당사자만 200명 가까이 됐던 것으로 파악된다.

마을 주민들은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채 머리에 물독을 인 전형적인 한국 아낙들의 모습을 기억한다고 한다. 현지에서 광복군을 연구하는 왕메이(王梅) 시안박물원 부관장은 "가족들은 두취진 민가를 빌려 살았다"며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좋았다곤 하지만 그 시절 중국 시골 사람들의 생활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고 했다.

◇ 해방 소식에 아쉬워한 이유

광복군 연구자 왕메이(王梅) 시안박물원 부관장(사진=김광일 기자)

 

대원들의 주요 임무는 해군기지·병참선·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 산업시설, 교통망에 대한 정보수집이었다. 여기에 시설 파괴, 주요지점 점령, 나아가 차후에는 일본 진입까지 고려됐다. 독수리작전 계획서에 따르면 이를 위한 1차 진입 목표는 서울과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 등 한반도 5개 전략지점이었다.

서울지역에는 훈련생 가운데 막내로 알려진 김석동 지사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사촌동생인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은 "형은 교동초등학교를 나와 서울 중심부에 살았었다"며 "서울 지리를 잘 알고 숨을 집까지 있었기 때문에 부름을 받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원 50명 가운데 38명은 혹독한 훈련 끝에 OSS 교관들에게 작전 투입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 7일.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은 시안에서 OSS 책임자 도노번 소장을 만나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다.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미국 OSS 책임자 도노번 소장(사진=독립기념관 제공)

 

그런데 그 직후 일본이 항복한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해방을 알리는 소식이었지만 전쟁에 뛰어들어 연합군 지위를 확보하려 했던 임시정부로서는 아쉬움이 남았다. 김구 선생은 당시 심정을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기억했다.

그렇지만 광복군이 끝까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내걸고 분투했다는 사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높아지고 있다.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은 "제가 어렸을 땐 독립이 우리 손으로 이룬 게 아니라 남이 선물로 갖다 줬다고 배웠다"면서 "하지만 선물은 받을 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강제병합 전부터 해방되는 그날까지 피 흘리며 싸운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볍게 평가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훈련장 360˚ 파노라마 사진(사진=김광일 기자)

 

자료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첩보교육과정(1945.6.23)」 (그래픽=임금진)

 

※ 이 기사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지낸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로부터 감수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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