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별길'에서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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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1999년 설악산 만경대에는 ‘별길’이 생겼고, 1998년 도봉산 자운봉에는 ‘배추흰나비의 추억’이 만들어졌다.

바위벽을 기어오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그는 산에서 살았다.

그렇게도 바위벽을 오르더니 남이 만든 길을 놔두고 새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가 새로 만든 바위벽 루트만 국내에 15개에 이른다.

국문과를 나온 시인이기도 한 그는 새로 개척한 길에 시를 한 편씩 걸어 놓았다.

89년 설악산 노적봉에는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93년 북한산 백운대에는 ‘시인 신동엽 길’, 97년 설악산 토왕골 ‘별을 따는 사람들’.

그가 개척한 새 루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깍아지른 바위벽에 이런 낭만적인 이름이라니.

2006년 등산학교 학생들과 함께 인수봉을 오르던 그는 추락 사고를 당했다.

수백 번도 더 올랐을 인수봉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모두들 놀랐고,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안도했지만, 사지를 못 쓰게 됐다는 소식에 다시 절망했다.

그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동창생이다. 그다지 교류가 없는 친구 가운데 한 명이지만, SNS 덕분에 근황을 간간히 듣고 있었다.

사고 소식도 그렇게 들었다.

사고를 당하고 13년이 흘렀다. SNS에 그의 근황이 전해졌다.

그 친구의 친구인 내 친구가 SNS에 올려놓은 소식이었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눈 오는 정월 대보름날 그를 찾아가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했다.

눈 오는 설악산을 그리도 좋아했던 그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 불편한 자세로 그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들었다고 했다.

거동이 불편한 그와 만날 때면 그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기의 잔에도 스스로 술을 채우곤 했다.

재활운동을 시작한지 13년 만에 그는 어깨와 손목, 손가락 몇 개를 움직일 수 있게 됐고, 늘 스스로 채우던 내 친구의 술잔에 술을 부어줄 수 있게 됐다.

내 친구는 자신의 SNS에 이렇게 썼다.

‘술은 달고 정은 깊어간다’

누가 찍었는지 그 장면이 내 친구의 SNS에 올라와 있었다.

온 몸의 힘을 짜내 펴지지 않는 팔로 소주병을 기울여 술을 따르는 그의 모습과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잔을 들고 있는 내 친구의 모습을 보며 정작 내가 울컥했다.

그 장면 뒤에 얼마나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을까 생각했다.

그는 그 술 한 잔을 따르기까지 고기 한 점, 술 한 잔 넘기기도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고, 내 친구는 그의 시중을 들며 상심한 그의 푸념을 듣고 또 들었을 것이다.

사진=스마트이미지 제공

 

몸을 가누기도 힘든 그를 찾아가 고기를 굽고, 술 한 잔 나눈 내 친구의 정성은 내겐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우정이다.

13년 만에 따라준 그 술잔에는 미안함과 고마움과 지난한 고통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내 친구 역시 술잔에 담긴 그 마음을 달고 또 쓰게 받아 넘겼을 것이다.

만난 곳이 어디든 그 곳은 별빛이 넘실대는 ‘별길’이 틀림없고, 내 친구와 내 친구의 친구는 거기서 진한 우정과 진한 술 한 잔을 나눴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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