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사 36년 만에 순직 인정…진상은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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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위 조사통해, '단순 자살' 故 김영민 소위 '순직 인정'
책임감 넘치던 소대장의 죽음 36년 만의 명예회복됐지만,
유가족 "착잡"…사망 이유는 밝혀내지 못해
권익위 "오랜 시간 경과…당시 근무자 소재파악도 어려워"
노래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의 주인공

기사와 관계 없는 사진입니다. (사진=자료사진)

 

최전방에서 경계근무를 하다가 의문사한 고(故) 김영민 소위(당시 23세)가 숨진 지 36년 만에 순직 인정을 받게 됐다.

늦게나마 고인의 명예는 회복됐지만, 사고가 발생한 이유는 밝혀내지 못해 유가족들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 36년 만에 명예회복, '단순 자살→순직 인정'

23일 국민권익위원회는 '단순 자살자'로 분류된 김 소위의 사망 사건을 순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국방부가 전공사상심의위원회를 열어 김 소위를 '경계 등의 직무수행 중 사망한 사람'으로 판단해 순직자로 인정했다.

서강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 소위는 지난 1982년 학군단(ROTC)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하지만, 21사단 일반전초기지(GOP) 중화기중대 소대장으로 복무한지 3개월 만인 9월 22일 새벽 초소에서 이마에 총상을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군은 제대로 된 조사 없이 '단순 자살'로 결론 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이에 지난해 김 소위의 형이 동생의 죽음을 재조사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해 권익위가 1년여에 걸쳐 다시 들여다봤다.

권익위는 당시 군부대 등이 작성한 사고 보고서, 김 소위가 남긴 서신 및 일기 등을 분석하고 학군단 선후배와 친구들의 증언을 청취했다.

그 결과 '김 소위가 책임감이 강하고 평소 부하를 아끼는 소대장이었다는 점, 시신에 난 여러 상처나 현장에 대한 초동조사가 미흡했던 점, 부대 상관과 갈등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 점'등을 들어 ‘단순 자살’로 특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갈등으로 비극이 벌어졌는지는 밝혀지지 못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재조사를 통해 순직이 인정되긴 했지만, 초동조사가 매우 부실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 당시 근무했던 사람들의 소재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라 죽음의 구체적인 사유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발견된 김 소위의 일기나 서신에도 검열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건 내용은 담겨있지 않았다.

◇ 36년의 가슴앓이…명예회복에도 착잡한 유가족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이다. 고인의 세살 터울 형 김영우(59)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착잡하다"고 운을 뗐다. 김씨는 "36년 동안 온 집안이 가슴앓이를 해왔다. 잊혀질 수 없는 억울한 사건"이라며 "순직 결정은 다행스럽지만, 정서적 기쁨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인턴 의사였던 형 김씨는 1982년 사고 직후 부대로 찾아가 시신을 살펴봤다. 의문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왼쪽 정강이에는 군화로 채여 움푹 파인 소위 '조인트 자국'이 시퍼랬고, 얼굴에는 찰과상이 선명했다.

소대장이었던 동생에게 그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건, 상급자 뿐이었기에 부대 내 갈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총을 자신의 머리에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명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총탄은 이마를 관통했는데, 그렇게 되려면 양팔을 벌려 소총을 잡아야하는 부자연스러운 자세가 나올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부대를 찾았을 때, 대대장은 식구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먼 산만 바라봤다. 중대장은 저희 앞에서 덜덜 떨면서 몇마디 대답만 하다가 자리를 떴다. 소대원들도 모두 우리를 피했으며, 동생과 24시간 붙어있던 소대장 전령은 갑자기 발령이 났다"며 모두 회피했다고 전했다.

동생의 사망 이틀 전 마지막 일기에는 "나도 침묵을 지키면 동조자가 된다. 말해야 한다. 그에게 말했다. 최후통첩을 했다"거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정의와 양심은 자살신청서(탄이에 의한)나 다름 없고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에는 두려움과 벽이 있다"고 적혀 있는 등 부대 내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이 발견되기도 했다.

외박을 나오면 사비로 내복을 사 소대원들에게 전해주고, 직접 운동을 가르쳐주겠다며 피트니스 잡지를 사서 부대로 보내달라는 편지를 형에게 보내기도 했던 김 소위다. 부하들을 살뜰히 챙기고 인정받던 동생이 무슨 일때문에 변을 당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숱한 의문에도 군부독재 시절 가족이 입회한 진상조사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군 당국은 '신변을 비관한 자살 추정'이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오히려 김씨에게 "가족에 뭔 일이 있었냐"고 캐물었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요청한 재조사 요청도 매번 묵살됐다고 한다. 김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필하려 했지만, 보수정권 시대에는 접수도 받지 않았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오래됐다며 못 해준다고 해 실망이 매우 컸다"고 회고했다.

권익위의 조사를 통해 늦게나마 진실에 다가설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순직이 인정된 고인은 오는 11월 2일 현충원으로 이장된다. 6.25 참전용사로 화랑무공 훈장을 받은 아버지와 함께 묻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김 소위의 합창반 '에밀레'의 선후배들은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라는 노래를 만들어 그를 추모했고, 이 곡은 1983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노랫말 중에는 "저 새가 나는 날 우린 모두 알리라. 그 소리 그 깊은 아픔을 모두 나아가 조용히 머리 숙여 그 소리 그 아픔 맞으리라"라는 대목이 있다.

김씨는 동생의 친구들과 함께 끝까지 진상을 규명할 방법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세월이 흘러서 진실이 햇빛 아래로 나오고 있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동생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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