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도 당했다'에 취소된 2018년 노벨문학상이 서운한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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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 칼럼]

거리에 찬바람이 불고 가로수 이파리가 물들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기다렸다. 수상자가 발표되면 서점으로 달려가 그의 대표작을 찾아 읽으며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마음을 다잡는 것이었다. 올 가을에는 노벨문학상이 주는 선물, 독서의 세례로 마음이 정화되는 축복을 누릴 수 없게 됐다.

스웨덴 한림원이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한 것은 천재지변도, 전쟁 때문도 아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도 당했다'는 성폭력 고발이 원인이었다. 한림원 종신심사위원의 남편이 연루된 성폭력 사건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한국 같았으면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다. 스웨덴은 세계 성평등지수 1위 국가답게 달랐다. 지난해 11월. 여성 18명이 한림원 종신심사위원인 카타리나 포로스텐손의 남편이자 스웨덴 문화계 거물인 사진작가 장클로드 아르노에게 성폭력 당한 사실을 폭로하자 동료 위원들은 프로스텐손의 사퇴를 요구했다. 종신심사위원 7명과 사무총장이 동반 사퇴하면서 압박을 가했다. 같은 종신위원이기는 하지만 그의 남편이 연루된 상습적인 성폭력 사건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경고였다.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지난해 말 이들 18명의 여성이 고발한 것을 기점으로 연극·공연·영화 등에서 활동하는 여배우 500여명이 공동성명을 내면서부터 시작됐다. 스웨덴 미투 운동을 이끄는 대표적인 활동가 수잔나 딜버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피해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의 수치와 책임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지워지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스웨덴은 지난 7월 1일 '명시적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강간'이라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파타(fatta)법'을 발효시켰다. 강간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한 셈이다. 이 법에 따르면 성관계에 있어 지금까지는 상대가 'no'라고 하지 않으면 'yes'인 것으로 보았는데 이제 'yes'라고 명시적으로 표현해야만 'yes'가 된다. 'yes'와 'no' 사이에 무수히 많은 애매모호한 상황이 이전에는 암묵적 동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절로 간주된다. 이 같은 변화는 미투 운동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어떠한가. 피해자가 사생결단의 각오로 혈혈단신 홀로 나서야 했다. 판사의 법리적 해석도 법 문항에 갇혀 판사 개인의 가치관과 신념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판결문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피해자 김지은이 업무상 상급자에게 명시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하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거절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마음속으로 성관계를 반대했더라도…… 현재 우리나라 성폭력 처벌 체계에서는 가해자의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되는 성폭력 범죄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죄나 무죄냐를 판단하는 판사는 명백한 증거와 객관성을 기준 삼는 것이 맞지만 판사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법 해석을 달리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 자기만의 법철학과 해석이 없다면 판결은 인공지능(AI)이 해도 된다. 인간은 사고하는 지성이기 때문에 법률로 정해진 원칙을 뛰어 넘거나 깨트리는 판결로 시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감동을 줄 수도 있다. 용기 있는 판결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릇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음에도 대부분의 판사들은 이를 두려워하거나 외면한다.

이 땅에서도 성 평등의 변화와 희망의 의미를 찾으려는 용기 있는 미투 운동이 일어났지만 대한민국 법원은 성폭력과 관련된 어떠한 법도 개정하거나 신설하지 않았다.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파타법'이라는 놀라운 결실을 얻어냈지만 대한민국 미투 운동의 결과는 너무나 초라하고 참담하다.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졌거나 희미해졌고 벌써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올가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소설을 읽을 수 없어서 섭섭한 것보다 한국 여성들의 '나도 당했다'는 용기 있는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사라져버리는 현실이 안타깝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을 취소하면서까지 '나도 당했다'는 여성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는 스웨덴의 법조·학술·문화·예술인들의 지성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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