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하고, 불도 끄고, 징계도 받는 소방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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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스토리] 1인 3역 하는 '멀티 소방관', 뒤에 숨은 건 고질적 인력난과 비현실적 행정

※이 기사는 전·현직 소방관들의 인터뷰와 소방청의 '구급차사로제고화대책' 통계, 소방청 문서를 바탕으로,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기사입니다.

내 책상에는 일과표가 붙어있다. 올해 6월부터 생긴 '소방관 일과표'다.

지금은 주간 근무이니 아침 9시부터 1시간 동안은 의무적으로 장비조작훈련을 해야 한다.

 

장비조작훈련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일과표가 생기면서부터는 강제성이 생겼다. 이제는 시간까지 고정돼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일과표를 지키지 않으면 문책'이라는 공문이 계속 내려오는 곳도 있다. 화재가 일과표 시간 맞춰 나는 건 아닌데. 다행히 우리 서는 그렇게 빡빡하진 않다.

그나마 주간 훈련은 양반이다. 야간에는 기초체력훈련을 포함한 교육훈련이 기다린다. 소방차와 구급차로 꽉 찬 서에서 기초체력훈련 할 공간은 마땅치 않다. 큰 소방서는 체력단련실이라도 있지만 내가 있는 지역은 휴게실조차 확보하기 힘들다.

소방서를 벗어나 운동하고 싶어도 "요즘 소방관들 일이 없나봐. 밖에서 놀고 있네"란 말을 들은 뒤로는 외부 운동 생각을 접었다. 그분들에게 소방관 일과표를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책상에서 일과표를 만드는 분들이 이런 걸 몰랐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가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펌프 차를 살펴보는 도중 출동 벨이 울린다. 동료들이 서둘러 출동한다. 남아서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데 김 주임님이 다가온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애써 눈을 피해보지만 소용없다.

"대형 면허는 어떻게 돼 가?"

'아무것도 안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서에서 운전 학원이랑도 연계 해 주잖아. 얼른 따야지. 임용 1년 내에 대형 안 따면 근무 평정 불이익인 거 알지?"

"네. 등록하겠습니다."

한 지역의 소방공무원 인사관리규정. 1종대형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못하면 근무평정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음을 명시해뒀다.

 

우리 지역의 인사관리 규정에는 '지방소방사로 신규임용된 사람은 신규임용일로부터 1년 이내에 1종 대형 운전 면허를 취득해야 하며, 그러지 못 할 경우 1종 대형 운전면허 취득 시까지 근무평정시 '우' 이상의 평정점을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고 적혀 있다.

공무원 시험 때 가산점 때문에 1종 대형면허를 따는 사람도 있었다. 난 1종 보통면허가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소방서에 왔더니 상황은 달랐다. 소방차와 구급차는 대형 면허가 있어야만 몰수 있다. 대형 면허를 몇 명이나 취득했는지는 소방서 성과관리에 그대로 반영된다. 위에서는 계속 1종 대형면허를 따라고 권고한다. 말이 권고지 사실 대형 면허를 안 따고는 못 배긴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동기 한 놈이 명이 의자를 끌며 옆으로 다가온다.

"그냥 빨리 따버려. 하다 보면 적응 돼."

동기는 몇 개월 전 대형 면허를 땄다. 취득한 뒤, 바로 구급차 운전에 투입됐다. 사설 구급차는 1종 보통이면 되지만 119 구급차는 1종 대형면허 소지자만 운전할 수 있다. 사고도 한 차례 있었다.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사고 이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거에 두려움이 생겼다고 했다.

최근에는 고과점수에 반영되는 지게차면허증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사실 지게차운전이 소방관의 성과에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격증을 따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경방(화재진압)대원에게 응급구조사 2급 자격증을 따라고 시키기도 한다. 구급대원은 응급구조사 자격증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이 과정을 모두 마스터하면 운전, 경방, 구급 세 개의 역할을 하는 '멀티형 소방관'이 된다. 운전도 하고, 불도 끄고, 구급도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멀티형 소방관, 나쁘게 말하면 비전문화. 어쨌든 지금은 '멀티형 소방관'을 원한다.

답답한 마음에 20년차 선배인 박 팀장님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박 팀장님, 운전대원으로 들어오셨지요?"

박 팀장이 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운전대원, 경방대원을 나누는 질문이 조심스러운 사람이 있지만 박 팀장님은 아니다.

"우리 때는 운전대원이랑 경방대원이랑 나뉘어 있었어. 차 전문가가 많았지. 나도 관련 분야에서 있다가 들어왔거든."

12년 전만 하더라도 운전과 경방 채용은 분리돼 있었다. 지금은 소방이라는 한 직렬로 통합해 뽑는다. 박 팀장님도 운전대원으로 들어왔지만 지금은 화재진압과 운전을 모두 맡고 있다.

"이젠 소방차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근데 뭐, 개인 역량 향상을 위해서라니 어쩌겠어. 소방관들을 상향평준화 시키겠다는 거잖아. 운전도 하고, 불도 끌 수 있게. 인력이 워낙 없으니 어쩌겠어."

박 팀장님이 믹스 커피 한잔을 내게 건냈다.

"사실 저는 소방차 운전하기가 좀 무섭습니다. 골목 진입하는 거 하며, 신호도 어겨야하고, 차선도 물고 가야하고...무엇보다 사고가 나면 다 우리 책임이고..."

1년간 숨겨왔던 말을 꺼냈다. 사실 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했다. 그게 핵심이다.

 

5년 동안 일어난 소방차 교통사고를 계급별로 분석해보면 10번의 사고 중 4~7번을 나와 같은 소방사가 냈다. 소방서의 막내들이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낸다는 뜻이다.

소방청은 "하위계급자 사고율이 높은 것은 경험부족에 기인한다"며 "소방사 계급 대상으로 한 특별교육이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성과 평가 때문에 억지로 면허 따게 하고, 당장 운전대 쥐게 하는데 사고가 안 나는 게 이상하지"

박 팀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명 '구급차사고제로화대책'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소방청은 교통사고가 나면 패널티를 주는 방안을 내놨다. 소방차나 구급차를 몰다 사고가 세 번 나면 성과급을 깎는다. 3년간 세 번의 사고를 내면 직위해제나 징계까지 내릴 수 있다. 이미 사고를 내면 소방서 차원에서 성과에 반영 되는데 이제는 공식적인 '벌'을 주겠다는 말이다.

반발이 나오자 "패널티 부과보다는 운전습관 분석, 교정 프로그램 강화 등 종합대책을 시행하는데 초점을 둘 것"이라고는 하지만,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반 강제적으로 그 일에 밀어 넣어놓고, 사고 나면 네 책임이라는 거잖아. 휴..."

박 팀장님도 한숨을 내쉬었다.

"삐, 삐, 삐, 삐"

출동 벨이 또 울렸다.

인근 빌라에서 한 시간 째 타는 냄새가 난다는 신고다. 겁에 질린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소방서 전체에 울린다. 동료들이 서둘러 출동 준비 중이다.

잠깐 나를 바라보던 팀장님이 이내 동기에게 운전을 지시했다. 살짝 머뭇거리던 동기는 곧바로 운전대에 올랐다.

가운데 자리에 앉았는데 마음이 불편하다.

더는 안 되겠다.

주말에는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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