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지은씨에게 용서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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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JTBC 영상 캡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여성심리학자인 해리엇 러너(Lerner Harriet)는 "성차별적 시각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상대방 남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가짜로 꾸미는 것은 물론 거짓말하는 것도 개의치 않도록 배웠다"면서 가부장제의 뿌리 깊은 폐단을 비난했다. 그런 암묵적인 교육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진짜 감정과 느낌에서 멀어지고 그 결과 우울증에 빠지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벨 훅스(Bell Hooks)는 남성으로부터 '오늘 기분 어때요?'라는 인사를 받으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진짜 상황과는 관계없이 '좋아요' '괜찮아요'라는 식으로 둘러댄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이 거짓으로 대답하는 까닭은 괜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또는 상대의 기분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이 벨 훅스의 주장이다.

수행비서 신분이었던 김지은씨가 지난 3월 방송에 출연해 털어놓은 말을 찬찬히 들어보면 벨 훅스가 분석한 내용과 같다. 거절하거나 어렵다는 말 대신 '머뭇거린 것'만으로도 자신한테는 최대한의 방어였고 거절이었다는 것이다. 김씨는 안 전 지사도 그걸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법원은 김씨가 취한 여러 태도를 보았을 때, 거절의사로만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러시아 호텔에서 안 전지사가 '외롭다. 안아 달라'는 말에 소극적이지만 응한 정황과 이튿날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순두부식당을 찾기 위해 힘썼다는 것을 들어 강제성이 없는 성관계였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적용한 법리적 판단을 하나하나 들여 보다 보면 낯이 뜨거워진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부지방법원에서 1심 무죄 선고를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대한민국 법으로는 아직 이 같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상대방 남성의 은밀하게 감추어진 성폭력에 죄를 물을 수 없다. 그러나 법원은 그 같은 성관계가 현행 형법 297조로는 처벌할 근거가 없지만 엄연한 불법이자 폭력이라는 견해는 내놓았어야 했다.

어떤 환경이든 상관없이 상대방이 거부의사를 드러냈는데도 성관계가 이뤄졌을 때 처벌하는 '노 민스 노'(No Means No) 룰이 입법화된 나라였다면 이미 구속됐을 안 전 지사다. 성관계 도중이라도 상대방이 그만하라고 했을 때 멈추지 않으면 폭력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이다. 스웨덴은 이미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룰을 적용하고 있다. 상대방의 적극적인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규정이다.

문제는 남자들이다. 남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벨 훅스의 주장이다. 특히 자기들보다 약자인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 폭력적이고 난폭하게 굴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밝혔다. 이런 행동을 하고서도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믿는데, 왜냐하면 자신은 여성에 의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 전 지사는 김지은씨가 자기를 파멸시켰다는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하다. 몇 번의 성관계 때문에 하루아침에 자신의 정치인생이 추락한 것이 김지은씨 탓이라는 고정된 인식이다. 그 같은 인식은 무혐의 판결을 받은 그가 언론에 밝힌 소감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다시 태어나도록 더 노력하겠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이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 반성한다거나 김지은씨와 위계에 의한 성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사죄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는 여성들과 불미스런 성관계를 갖는 실수를 저질러 오늘과 같은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더 노력하겠다는 각별한 자기 다짐일 뿐이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을 성폭력범으로 고소한 전 수행비서 김지은씨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 때문에 자신이 걸어가야 할 미래의 길이 가시밭길이 된데 대한 원망만 있어 보였다. 그렇더라도 '혐의 없음'을 인정받은 안 전 지사는 최소한 이 말을 했어야 했다.

"김지은씨에게 용서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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