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칼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 +

뉴스듣기
하루키 소설의 '헛간'과 이창동 영화의 '비닐하우스' 속 여자

영화 '버닝' 스틸컷.
알려진 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다. <버닝>은 <헛간을 태우다>의 스토리라인과 주제에 '계층'이라는 첨예한 소재를 더했다.

하루키는 '헛간'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무의미한 실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헛간은 곳간의 반대어다. 곳간이 식량이나 물건 같은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장소라면 헛간은 자질구레해서 훔쳐갈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넣어두는 공간이다. 하루키는 헛간을 군중 속에 파묻혀 존재조차 희미한 익명의 사람과 동일시한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단지 사라질 뿐인 그런 인간에 대해 말한다. 헛간을 불태워 지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일과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한 사람이 홀연히 사라짐에 대해 묘한 의문을 남기는 것으로 끝맺는다.

영화 <버닝>은 하루키 소설의 줄거리에 계층 논리를 덧입힌다.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의 차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강남 상류층의 젊은 남자인 '벤'(스티븐 연)과 가난한 시골 청년 '종수'(유아인)를 통해 한국사회의 민감한 계층구조를 건드린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내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수)는 상류층 남자의 소비재일 뿐이다.

이창동은 하루키의 '헛간'을 '비닐하우스'로 바꿨다. 헛간은 버림받은 농경사회의 무용지물이라는 존재 의미가 담겨있지만 비닐하우스에는 자본주의 거대도시에 기대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변두리 사람들의 고된 풍경이 지배한다.


하루키와 이창동이 똑같은 스토리라인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약간 다르지만 '여자'에 대한 시선은 같다. 두 사람은 여자를 위한 나라는 계층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류계층의 여자에게는 자기만의 나라가 없다. 헛간이거나 비닐하우스 같은 공간만 있을 뿐이다. 쓰고 나서 버려지는 일회성 소비재다.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문학동네 제공)
<헛간을 태우다>의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많은 헛간이 있고, 그것들이 모두 나에게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해변에 외로이 서 있는 헛간이나, 밭 가운데 있는 헛간들… 15분이면 깨끗이 타죠. 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아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라질 뿐이죠. 갑자기 말이죠."


두 달 간격으로 헛간을 태운다는 '그'의 연인이 된 '그녀'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춘 것 같이 <버닝>의 '해미'도 어느 날 사라진다. 해미의 친구는 행방불명된 해미의 소식을 듣기 위해 찾아온 종수에게 세상 어디에도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한다. 하루키나 이창동에게 하류층의 젊은 여자는 헛간과 비닐하우스처럼 쓰고 나면 버려질 뿐이다.

봄이 오늘 길목에서 외쳤던 '미투' 역시 불태워져 흔적 없이 사라진 헛간이거나 비닐하우스가 되고 말았다.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일삼은 거물급 정치인과 권위 있는 성직자와 권력을 쥔 예술인, 사회 각계각층의 '갑'의 남성은 <헛간을 태우며>의 '그'가 말하듯 가솔린을 뿌리고 성냥을 긋고는 금방 도망친 뒤 먼 곳에서 쌍안경으로 느긋하게 지켜보는 지도 모른다. '그'의 말처럼 조그만 헛간 하나 태웠다고 경찰이 그리 움직이지도 않는다. 남은 것은 초라하고 지친, 우군도 없고 안식처도 없는 미투 여성들의 초라한 자괴감뿐이다.

하루키의 헛간과 이창동의 비닐하우스는 이들 여성에 대한 관심이다. 헛간과 같이 비루해진 젊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다. 그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상류계층 남성들에 대한 항의다.

하루키는 <헛간을 태우다>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때때로 불에 타서 무너져가는 헛간을 생각한다'는 주인공 독백처럼 사라진 '그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손에 의해 불타는 헛간을 생각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심판하지 않음으로써 지독한 기억을 혹은 심판하리라는 오기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버닝>을 통해 하루키와 달리 '심판'한다. 헛간을 혹은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남자를 잔혹하게 살인하는 것으로 상류계층에 만연한 윤리와 도덕이 사라진 부조리를 정죄한다. 이창동에게는 오늘, 지금, 바로 이 순간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이 더 문제적인 것이다.

추천기사

클릭! 똑똑한 소비생활

많이 본 뉴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