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 성추행 피해자 A씨는 ‘오태석의 몰락’을 원치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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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태석은 A씨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연출가 오태석 씨. (자료사진/노컷뉴스)

 



“선생님께서는 이윤택과 같은 괴물이 아닙니다. 그건 확신해요.”

극단 목화를 이끌고 있는 연극계 거장 연출가 오태석(78) 씨의 성추행 폭로가 나온 며칠 뒤인 19일 오후, 해당 글을 올린 피해자 A씨(극단 목화 단원 출신)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힘겹게 입을 뗀 A씨에게 직접 듣는 성추행 피해 내용은, 그가 SNS에 올린 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A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습 때만큼은 너무도 완벽한 예술가이고 존경스런 모습’을 보인 연출가 오 씨는, 저녁 술자리만 되면 마치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의 옆에 앉은 여성 단원의 허벅지와 사타구니 등을 만졌다. “그만하라”는 요구도, “제가 따님 친구”라는 호소도 오 씨의 손놀림을 멈추는 데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글이 아닌 통화에서는 묘하게 다른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건 오 씨에 대한 기대와 존경심이 A씨 말투에서 시종일관 묻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좀 의외였다. 이윤택 씨로부터 성추행 혹은 성폭행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의 통화나 메시지에서는 대부분 떨리는, 혹은 참기 어려운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A씨는 자신을 성추행한 오 씨를 호칭할 때마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빼먹지 않았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발음해서 입에 밴, 고치기 힘든 버릇이 아니었다. A씨는 그에게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연극인으로서 여전히 그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A씨는 오 씨가 “이윤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이윤택처럼 배역을 빌미로 삼지 않았으며, 작품 할 때는 작품에만 집중했다”고 했다. 이 씨처럼 발성법을 가르친다는 명목 하에 신체접촉 같은 시도 자체가 없었고, (자신이 아는 바로는) 성폭행 같은 일도 저지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A씨가 그런 말을 반복한 이유는, 기자가 그리고 일반인들이 오 씨를 이윤택 씨와 동급의 괴물로 인식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한 개인의 특수한 문제를 넘어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이다. A씨는 오 씨에 대한 문제제기보다 이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 차원에서 용기를 내 미투에 동참했다.

때문에 오 씨 개인의 몰락을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오 씨의 이름도 이니셜도 절대 공개하지 않은 채, 폭로를 했다. A씨는 그저 스승 오 씨가 그 글을 본 뒤, 연극계 원로이자 거장으로서 잘못한 일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기를 희망했다. 미투 파문 이후 연극계가 손가락질 받는 상황에서, 책임지며 물러나는, 그런 본을 보일 어른이 한 명쯤은 있기를, 그리고 그 어른이 오 씨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했다.

연출가 오태석 씨. (자료사진/노컷뉴스)

 

그것이 그동안 언론과는 접촉을 피하던 A씨가 처음으로 취재에 응한 본 기자에게 한 간곡한 당부였다. 그래서 함께 정보를 공유하며 취재 중인 타 매체 기자들에게 부탁했다. “양해를 해준다면, 오 씨에게 성추행 폭로 글에 대한 입장이 무어냐를 따지고 묻기보다, A씨의 의사를 전달하고, A씨의 바람대로 오 씨가 스스로 입장을 내고 아름답게(?) 물러날 수 있도록 해보자”고. 거장에 대한 나름의 예우(?)였고, 이에 다른 기자들도 동의했다.

결론만 말하면, 안타깝게도 A씨의 바람도, 기자들의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 씨를 만나기 위해 20일 오전 자택을 찾았다. 벨을 누르기 전 전화를 했다. 휴대전화가 없는 오 씨를 대신해 아내가 모든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알려져, 오 씨의 아내에게 연락했다. 오 씨 아내는 “통화할 일이 없다. 전화를 안 받겠다”며 끊었다.

오 씨의 아내에게 “저희는 선생님이 이윤택 씨처럼 비참하게 무너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제보한 피해자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길 원하고 있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남겼으나 응답은 없었다. 직접 자택의 벨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안 지나 어느 한 매체가 오 씨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후 여러 매체가 ‘오태석 성추행 의혹’을 보도했고 현재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오 씨는 여전히 잠적 상태이며 극단 목화 측도 오 씨의 행방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윤택 씨가 지난 20일 공개 사과 기자회견을 하기 전에 사전 리허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안겼다. 물론 그의 사과에 영혼이 안 담겼고 짜인 각본 같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내부자의 폭로는 그 파급력이 달랐다.

사실 오 씨도 잠적하기 이전에 피해자를 만나려고 시도했다. 피해자의 글이 올라온 뒤 극단 단원을 통해 A씨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오 씨가 A씨에게 사과하려 했던 건지, 회유하려 했던 건지는 알 수 없다. A씨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거절했기에 만남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A씨는 SNS를 통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당부를 재차 남겼다.

하지만 오 씨는 잠적을 함으로써 A씨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가 얼마나 더 오랫동안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채 지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러는 사이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던 피해자들의 분노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 행동을 논의 중이고, 또 다른 피해자가 폭로를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현재 잠적 중인 오 씨는 곧 해외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극단 목화가 오는 28일(현지시간)부터 3월 1일까지 페루 리마축제 개막작으로 ‘템페스트’를 공연하기로 돼 있다. 페루는 잠시간의 도피처가 될 수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지금 내리는 비가 잠시 내리다 그칠 소낙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뒤끝작렬]은 CBS 노컷뉴스 기자들의 취재 뒷얘기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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