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평창 레터]"석희야, 4년 전 소치의 미소를 보여줘"

노컷뉴스 이 시각 추천뉴스

닫기

- +

이 시각 추천뉴스를 확인하세요

'이 미소를 평창에서도' 2018 평창동계올림픽 한국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주장 심석희는 4년 전 막내로 출전했던 소치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그야말로 전율의 스퍼트로 역전 금메달을 이끌었다. 이번 대회에서도 그의 역할이 기대된다.(자료사진=대한체육회)

 

심석희(21 · 한체대)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뜻하지 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존경하던 스승으로부터 손찌검을 당한 사건. 4년 동안 꿈꿔온 최고의 무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5일 오후 결전지인 강원도 강릉 올림픽선수촌에 입성한 심석희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폭행 사건이 벌어졌던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출발한 버스였습니다.

한국 쇼트트랙 여자 대표팀 주장인 심석희는 김아랑과 최민정 등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장비와 경기복 등 짐을 챙기며 입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심석희는 잠깐씩 미소를 보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거웠습니다.

이날 대표팀의 입촌 인터뷰에서도 심석희의 상황은 잘 드러났습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이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상의해 정한 인터뷰 대상자는 최민정과 심석희, 2명이었습니다.

결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예민해진 만큼 질문도 제한됐습니다. 최민정은 질문 2개, 그러나 심석희는 입촌 소감만 묻기로 돼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간신히 아문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 질문이 나올 수 있을지 몰라 질문을 딱 1개만 해달라고 취재진에 공지한 겁니다.

'어두운 주장' 심석희가 5일 오후 강원도 강릉 올림픽 선수촌 입촌을 위해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짐을 정리하고 있다.(강릉=노컷뉴스)

 

심석희는 먼저 입촌 인터뷰를 진행한 최민정에 이어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여유있게 인터뷰를 마친 최민정과 비교해 아무래도 다소 진중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치의 폭행과 선수촌 이탈, 복귀까지 우여곡절 끝의 첫 인터뷰였기 때문입니다.

입촌 소감에 대해 심석희는 "우선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니까 더 (올림픽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고 이제부터 진짜 본격적인 준비를 마무리하는 단계니까 부상없이 잘 마무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대부분 설레고 패기있는 출사표를 던지는 다른 선수들의 입촌 소감과 달리 사뭇 건조한 느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지난달 30일 심석희의 생일에 동료들이 준비한 깜짝 축하 선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맏언니 김아랑은 심석희, 최민정 등 동료들과 함께 찍은 웃음 가득한 생일 축하 사진을 SNS에 게재했습니다. 김아랑은 "D-10, 힘들어도 힘내기! 흔들리지 말기! +수키(심석희)생일 추카추"라는 글도 남겼습니다.

당시 사진의 심석희도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날 입촌 때 심석희는 이 질문에도 "얼마 전에 생일이었는데 대표팀 선후배들이 잘 챙겨줘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만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더 이상 관련 질문을 던질 수 없어 경기에 대해 물었습니다. 심석희는 3000m 계주 준비 상황에 대해 "계주는 워낙 다들 절실하고 많은 준비를 해오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얘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고, 라이벌 중국의 견제에 대해서도 "가장 많이 견제되는 선수들이기 때문에 좀 더 극한의 상황을 만들어서 훈련했다"고 답했습니다.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한 달 앞둔 지난달 10일 심석희가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공개훈련을 하는 모습.(사진=황진환 기자)

 

사실 심석희는 활달한 성격은 아닙니다. 신중한 데다 말투도 다소 느리고 어눌합니다. 5년 전 인터뷰 때 처음 만난 심석희는 당시에도 "나는 키가 커서 순발력이 좀 부족하고 빠릿빠릿하게 잘 못하고 발도 좀 느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쉽게 웃는 모습을 보기 어려운 편입니다. 웃어도 까르르 터뜨리기보다 배시시 지어낸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심석희가 가장 크고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4년 전 소치동계올림픽 때입니다. 3000m 계주 결승에서 숙적 중국을 제치고 극적인 역전 우승을 안겼던 순간입니다. 당시 심석희는 대표팀의 마지막 주자로 나서 눈부신 스퍼트로 중국의 리젠러우를 따라붙더니 마지막 반 바퀴에서 제치며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전율의 스퍼트로 짜릿한 역전 금메달을 일궈낸 심석희는 밝게 웃으며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승리의 하이파이브를 나눴습니다. 비록 이후 심석희는 조해리, 박승희, 김아랑 등 동료들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에 앞서 보여준 미소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물론 중국은 반칙으로 실격됐지만 그래도 심석희의 역주는 통쾌했습니다.)

4년 전 소치에서 심석희는 대표팀 막내로서 위기의 한국 쇼트트랙을 구해낸 큰 일을 해냈습니다. 이제 4년이 흘러 평창에서는 어엿한 대표팀의 주장이 됐지만 이제는 역경에 처한 자신을 구해내야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심석희가 4년 전처럼 환하고, 자신의 키처럼 큼지막한 웃음을 만면에 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음은 그때처럼 나중에 터뜨리고 힘들었던 순간과 서러웠던 기억들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면 됩니다.

'바로 이렇게 웃어주렴'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 에이스 심석희가 2014년 소치올림픽을 마친 뒤 3월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꽃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모습.(사진=황진환 기자)

 

ps-심석희는 짧았던 입촌 인터뷰 내내 좀처럼 웃지 않았습니다. 어두웠던 표정이 그래도 밝아진 것은 인터뷰를 마친 뒤였습니다. 적잖은 취재진이 "힘을 내라"는 말을 건넸고, 그래도 주위에 얼굴이 익은 기자들을 알아본 심석희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후 "이제 좀 웃으라"고 보태는 기자들의 말에 조금 더 표정이 펴졌습니다. 4년 전 소치에서 띄웠던 레터의 제목은 "17살 여고생? 석희야, 넌 이미 영웅이야"였습니다. 4년이 지나 고향인 강릉에서 올림픽을 치르게 된 심석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석희야, 4년 전 소치 때처럼 미소를 보여줘"

0

0

오늘의 기자

    많이본 뉴스

      실시간 댓글

        상단으로 이동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다음 카카오채널 유튜브

        다양한 채널에서 노컷뉴스를 만나보세요

        제보 APP설치 PC버전

        회사소개 사업자정보 개인정보 처리방침 이용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