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돌 한글날 여는 선언…"언어는 인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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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 "정치판·공론장 말, 쉽고 예의 있어야"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한때 우리는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쓸 수 없던 시대를 살았다. 지난 1986년 외래어표기법을 만들면서 국가가 '자장면'만을 표준어로 인정해 온 탓이었다. "자장면이 맞다" "짜장면도 맞다"를 두고 사람들은 20년 넘게 티격태격했다. 그리고 2011년 '짜장면'이 표준어로 추가되면서 논쟁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이와 비슷한 문제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지난 20년 가까이 국어시민운동에 앞장서 온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는 "국가에서 강요하는 언어 규범에 얽매이다 보면 정작 중요한 문제에 눈을 돌리기가 어렵다"며 말을 이었다.

"과거 '자장면만 써야 한다'고 규정한 것은 국가였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얽매여 있었던 거죠. 저는 이런 식의 언어 규범이 '맞냐' '그르냐'를 따지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굳이 '맞춤법을 파괴해도 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이러한 언어 내부의 문제에 붙잡히게 되면 정작 우리 생활, 사회에 미치는 언어의 영향을 직시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건범 대표는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선언적 표현을 강조했다. 그가 언어를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인권과 연결짓게 된 데는 중요한 경험들이 작용했다.

◇ 그룹사운드 '휘버스'가 '열기들'로 이름 바꿔야 했던 시절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사진=이 대표 페이스북 화면 갈무리)

 

"제가 살면서 눈이 굉장히 나빠져서 일급 시각장애인이 됐어요. 그러면서 정부의 활동보조를 받게 됐고, 그것 때문에 장애인 지원하는 곳에 갔는데, 담당자가 '바우처(voucher·상품교환권)를 발급해 주고…'라고 얘기를 하더군요. 어쨌든 고등교육까지 마친 제 입장에서도 '바우처가 뭐지?'라며 굉장히 당황했고, '접수가 굉장히 어려운 것 아닌가'라고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나마 저는 중고등학교, 대학 때 영어공부도 하고 했는데, 그렇지 않은 분들이 우리 사회에는 굉장히 많잖아요. 특히 장애인이나 취약층, 노인세대를 볼 때, 바우처와 같은 말을 공공언어로서 복지정책 등을 설명하는 데 마구 쓰고 있는 현실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죠."

이 대표는 "이러한 공공언어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던 것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으로 구속됐을 때"라며 "그때 감옥에서 절감한 것은 법률용어를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점이었다. 검찰의 공소장, 재판부의 판결문 등을 봤을 때 정확하게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이 점에서 "정치판과 공론장의 언어는 쉽고 예의 있는 말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지론이다. 하지만 우리네 말과 글은 일제, 군사독재와 같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를 충족시켜 오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우리말과 한글은 소중한 민족 정체성의 한 요소입니다. 헌법적인 사안이죠. 한반도는 근대화 직전에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면서 우리말까지 빼앗기고, 말살 당할 위험에 처했죠.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 민족하면 우리말과 글로 연결될 만큼 언어와 민족이 동일시 됐습니다. 그런데 해방 뒤, 비록 분단되기는 했지만 남쪽에서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세우고 유지해 오는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가 악용된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는 "1970년대, 제가 어릴 때 영어로 된 가수들 이름을 전부 우리말로 바꾸지 않으면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게 했던 기억이 난다"며 "지금 40대 중반 이상이면 다들 이름을 기억할 만한, 당시 대학가요제로 유명한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즈'(Sand Pebbles)가 '모래와 자갈'로, '휘버스'(Fevers)가 '열기들'로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물론 '그룹사운드 이름을 꼭 영어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예술, 사람들의 사적인 생활 등에서까지 너무 지나치게 민족을 강요하는 형태로 국어순화가 일어난 데 따른 부작용이 굉장히 컸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우리는 오히려 정치적인 억압과 강압적인 국어순화를 마치 한몸인 것처럼 여기게 됐어요. 1980년대 국어순화, 우리말 쓰기를 무조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는 무조건 용인돼야 하는 것'으로 자유화의 역설을 맞이하게 됐다고 봐요. '내 마음대로 말하는 데 뭐가 문제냐'라는 정서가 많이 퍼져서 외국어 남용, 거친 욕설 등을 마구 써도 되는 사회 분위기의 기초가 만들어지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대표는 "결국 무엇 때문에 우리말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교육, 가정생활 등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사회 분위기, 문화 생활로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됐어야 하는데, 국가가 강요하는 형태로 흘러오다 보니 오히려 부작용이 커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 "블라인드 채용,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 없는 난해한 말"

(사진=자료사진/노컷뉴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유명한 훈민정음 서문의 일부다. 이 대표는 "한글 창제 정신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 훈민정음 서문"이라며 "한글 창제 정신은 오늘날의 인권 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역설했다.

"훈민정음 서문에서는 백성들이 제 뜻을 펴게끔 돕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고 강조합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두 가지 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하나는 문자를 읽고 뜻을 이해하는 것, 나머지는 누구나 그 방식으로 자기 뜻을 펴는 것이죠. 요즘으로 치면 '알권리'와 '표현의 자유'인데, 이것은 오늘날 인권 문제의 가장 핵심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말들이 생활의 많은 정보를 막고 있잖아요. 우리의 여러 권리 중에서 특히 알권리에 관한 문제가 상당히 크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그는 "정부에서조차 국민생활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 말들을 자꾸 영어로 쓰니까 문제가 된다"며 "그러다보면 국민들이 중요한 정책이나 정치적 사안에 접근하는 데 걸림돌이 생기고 참여를 꺼리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비근한 예로 최근 정부에서 '블라인드(Blind) 채용'이라는 말을 많이 쓰잖아요. 시각장애인을 '블라인드'라고 부르는데, 시각장애를 지닌 제 입장에서 보면 블라인드 채용은 굉장히 배려 없는 말입니다. '블라인드 채용이 혹시 시각장애인을 채용하는 거냐'는 식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꽤 있어요. 블라인드 채용이 정확하게 어떤 정책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점이 큰 문제예요. 정보를 가린 채 면접 등을 보기 때문에 '정보 가림 채용'으로 쉽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채용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이니 '기회 균등 채용'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죠."

이 대표는 "애초에 정책 이름은 국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측면에서 쉬운 말을 선택해야 한다"며 "어렵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정책용어로 사용하는 것은 국민 전체의 소통에 좋지 않다"고 꼬집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생명과 안전에 관련된 말을 어렵게 써서는 절대 안 됩니다. 최근 행정안전부에서도 'AED 자동제세동기'라는 어려운 말을 '심장충격기'로 바꾸기로 했어요. 한글문화연대에서 3, 4년 전부터 문제제기를 했던 부분이죠. 저희는 어려운 안전 용어를 수집하고 고쳐가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싱크홀'(sink hole), '논슬립'(non-Slip) 역시 '땅꺼짐 현상' '미끄럼 방지'로 하루빨리 알기 쉽게 바꿔야 해요. 국민들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보장할 수 있도록 법률용어를 쉽게 바꾸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찌 보면 쉬운 말 사용으로 민원이 줄면 비용도 줄 테니 공무원들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죠."

"언어가 최종적으로 해야 할 역할은 국민 생활의 질서·규칙을 규정하는 것, 결국 '정치'에 있다"고 이 대표는 강조했다.

"국민들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로 올바른 말을 사용하는, 자신과 동등한 자격을 갖춘 시민으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는 인식이 자리잡도록 도와야 합니다. 막말하지 않고, 자기만 독점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배려해 가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민적인 예의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아이들이 신조어나 줄임말을 써서 문제'라는 식의 단순한 접근은 오히려 생활과 엮인 언어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할 필요가 있어요."

◇ "공무원들, 자기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공문서 써야"

지난 2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17차 범국민행동의 날'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 대표는 "1970, 80년대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는 민족의 주체성이나 자주성을 강조하면서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민족의 적'처럼 여기도록 만들었다"며 "이런 식으로 말과 글을 억압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결국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러한 권위적인 시대 언어의 대척점에 지난 겨우내 불타오른 촛불 광장을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촛불 광장이라는 데는 어찌 보면 우리 국민들의 공론장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장에 가서 보면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면서 잔치판, 축제 같은 느낌도 들었잖아요. 그중에서도 제가 아주 인상 깊게 본 것은 연령이나 성별 등에 관계 없이 다양한 시민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장면들이었어요. 국민들이 광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러한 경험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우리 사회에 실제로 이렇게도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민주적인 의사소통이 무엇인지를 촛불로 밝힌 광장이 알려줬다고 봐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국어를 지킨다"는 이 대표의 말에는 그가 지금까지 짚어준 문제의식이 오롯이 녹아 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쉬운 말에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선언을 떠받치는 동력이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나라에서, 학교에서 '우리 언어는 우리 민족의 말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를 강요했던 측면이 큽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국민들에게 강요와 억압으로 다가간 것이 문제였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그 다음 세계화 과정에서 영어 등 외국어 사용이 많아지면서 한쪽에서는 '영어 숭배는 사대주의'라고, 다른 쪽에서는 '다 필요하니까 쓰는 말이다. 당신들이야말로 국수주의'라며 서로 대립하는 갈등 구조가 생겨났죠.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하는 일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 민주공화국답게, 우리 국민이 주권자답게 생활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겁니다."

그는 "무엇보다 민주적인 정치 참여를 보장해 주는 언어생활이 중요하다"며 "외국어 남용 등의 문제에 대해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접근하게 되면, 그러니까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언어를 보지 않으면 실생활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차별하게 된다"고 역설했다.

이 대표가 "서로 배려하면서 말할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자"고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가꿔야 한다. 민주주의와 인권 차원에서 남을 너무 헐뜯고 차별하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말을 사용하는 방식은 고쳐가야 하는 거죠. 이것은 국민생활이라는 문화의 큰 줄기에서 바꿔가야 할 일이니다. 하지만 공공의 책무를 지닌 국가, 공공기관은 다르다고 봅니다. 공무원들은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처지에서 특히 언어생활에 신경써야 해요. 제가 공무원들에게 '자기 어머니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공문서를 써야 한다'고 당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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