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아들 영정사진 앞에 선 아버지의 소리없는 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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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국정원 마티즈 사건' 당시 2박3일 취재회상기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아버님과의 첫 만남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2015년 7월 19일 임 과장의 시신이 장례식장에 안치되던 날, 저는 우연히 숨진 국정원 직원 임모 과장의 유가족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됐습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유족들의 따가운 눈총에 안절부절못한 순간이었습니다.

한두 평 남짓한 공간에서 숨소리조차 조심스럽던 제게 임 씨의 아버지(임희문·80)가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기자님,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죠?"

짧은 인사와 함께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손에 든 노트북과 녹음기를 보고 추정한 듯합니다.

"아닙니다, 아버님. 힘드시죠..."

이렇게 짧은 대화가 끝났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진 아버지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기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때는 '그러려니' 하면서 무심코 지나쳤습니다.

빈소는 철통보안에 부쳐졌습니다. 국정원 직원과 경찰은 보안구역을 방불케 하듯 취재진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대부분 취재기자들은 로비에 있는 의자에 앉아 오가는 방문객들만 붙잡고 내부 분위기를 파악해야 했습니다.

저녁쯤 잠시 빈소 밖으로 나온 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말없이 곡개를 숙이며 인사한 제게 다가온 아버지는 다시 한번 손을 먼저 잡아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기자님, (접객실에서... 식사라도 하시고…"

말끝을 흐린 뒤 힘없이 돌아서는 아버지를 보니, 기자의 촉이 발동했습니다. 국정원과 경찰에 둘러싸인 아들의 시신을 곁에 두고 보내는 노인의 '시그널'을 감지한 겁니다.

물론 모든 유족들이 이같은 시그널을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 씨의 아내를 비롯한 나머지 유족들은 취재진의 접근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잠시 장례식장 관계자들도 만났습니다. 임 씨가 숨진 현장을 찾았던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사고 현장을 가는데, 어떤 남자 세 명이 '어디 가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래서 '자살 신고 있어서 가본다'고 하니까, 길을 알려주더라고요. 근데 옷차림이 평범한 사복이고 해서 누구냐고 물으니까, 친구들이래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거기는 일반 사람들이 다니는 곳도 아니었거든요"

국정원 직원의 자살에 나타난 의문의 친구들. 아버지가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들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빈소 근처 벤치에서 쪽잠을 자며 기다린 끝에 밤늦게 잠시 아버지와 조우했습니다. 아버지를 내내 감시하던 남성(국정원 관계자로 추정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아버지께 다가가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아드님께서 자살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할 말이 있으신데, 누가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요?"

순간 찰나에 아버지의 얼굴에는 갈등하는 표정이 역력히 묻어났지만,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저와 눈을 맞추며 두 차례 정도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는 빈소로 들어간 뒤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 취재도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최근 CBS노컷뉴스가 아버지를 다시 만나 속사정을 들었습니다. 당시 정부 당국의 입막음과 군에 있는 손녀딸을 생각해, 아들의 수상한 죽음을 가슴에만 묵혀둬야 했던 아버지의 설움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물론 김 씨의 죽음은 당시 경찰 조사대로 자살일 수도 있습니다. 민간인 사찰 의혹 사건 관계자였던 임 과장이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결론은 꽤나 그럴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유족의 증언처럼, 자살한 임 씨의 얼굴과 몸에 심한 상처들이 있었던 점은 다른 가능성을 추측게 합니다. 차량에서 번개탄을 태워, 질식으로 숨진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입니다.

여기에 임 씨가 숨지기 하루 전날 모친에게 전화해 "엄마, 나 죽으면 어떻게 해?"라고 말했던 점과 임 씨가 집을 나와 숨지기까지 5시간의 행적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점, 임 씨가 숨진 것을 경찰보다 먼저 파악한 국정원이 임 씨 아내에게 전화해 "119에 신고하 라"고 지시한 점(경찰은 사건 현장을 수습·조사하는 반면 119구조대는 현장을 가급적 보존합니다) 등도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원 산하에 '적폐청산 TF'를 구성해 국정원 개입 의혹 사건 13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습니다. '국정원 마티즈' 사건으로도 불리는 임 과장의 죽음도 이 중에 포함됐습니다. 사건에 대한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길 바랄 뿐입니다. 무너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자, 한 가족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이 될 겁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취재 당시의 한 장면을 전하면서 '취재 회상기'를 마칠까 합니다.

새벽 5시쯤, 아버지는 빈소에 있는 임 씨의 영정 사진과 단상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렸습니다. 혹여나 묻었을 먼지를 털어내는 아버지를 둘러싼 시·공간이 정지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한참 동안 영정사진을 바라봤습니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노인의 뒷모습이 자꾸만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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