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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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 ①] "원인은 여성혐오"라 하면 달라지는 것들

지난해 5월 21일,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시민들이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의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이고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어느덧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1주기를 맞았다. '여성이기에' 죽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 안의 두려움을 용기 있게 발화한 여성들 덕에,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의 연대'가 머물렀던 자리로 재발견됐다. CBS노컷뉴스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의 의미를 짚고, 사건 이후 페미니즘이 보다 활발하게 논의돼 자연스레 일상 속에 들어온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묻지마 범죄'가 아니다
<계속>

지난해 5월 17일 새벽, 한 여성이 죽었다. 서울 강남역 인근의 한 주점 건물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범행을 저지른 30대 남성 김모 씨는 화장실에 숨어 있으면서 여성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진술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강남 한복판에서, 남자친구도 동행해 있던 비교적 '안전한' 상황이었음에도, 얼마든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황망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그럼에도 경찰과 검찰은 이 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해 범행의 중요한 동기를 약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피해자가 들어오기 전 6명의 남성은 그대로 '살려두었다'는 점이나 "여성들이 나를 무시했다"는 가해자의 진술에 담긴 의미는 충분히 고려되지 못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일면식이 없고,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특징만 부각됐을 뿐이다.

14일 오후 6시,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페미당당 주최로 '묻지마 범죄를 묻다'라는 제목의 세미나가 열렸다. 2012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묻지마 범죄자 특성 이해 및 대응방안 연구]의 저자이자 심리학, 범죄학, 여성학을 두루 거친 김민정 연구자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왜 '묻지마 범죄'로 명명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정신질환자를 혐오하는 데에 묻지마 범죄가 활용될까봐 걱정했지, 여성혐오를 지우는 데 쓰일 줄 몰랐다"며 "지식, 공권력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여성혐오 동기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면서 계속 이 단어(묻지마 범죄)를 쓰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 연구자는 "여성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남성에 비해 죽는 사례는 너무 많다. 여성의 죽음이 디폴트라는 것은, 범죄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약자니까 죽는다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이게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여볼 생각조차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묻지마 범죄' 안에 가두는 까닭

지난해 5월 21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진행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추모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더 이상 여자라서 살해당하고 싶지 않아'라고 쓰인 손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김 연구자는 우선 각종 수사기관이 '묻지마 범죄'라고 했으니 그 말이 맞는 것 아니냐는 반론에 "틀리다"고 답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식은 원래 객관적·과학적·중립적이지 않고, '묻지마 범죄 지식담론'은 오히려 주관적·비과학적·혐오적이다. 연구자는 그 사람의 시각과 해석 안에서 연구할 수밖에 없는데 그간 만들어진 지식체계는 워낙 남성 중심적이었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에서 이루어진 묻지마 범죄자 연구가 지닌 약점을 지적했다. 애초에 사례를 수집할 때부터 노숙자, 일용직 근로자, 전과자, 정신질환자들의 범행에 초점을 맞춰 애초에 존재하는 '동기'를 흐릿하게 한 점, '여성이라 죽였다'는 가해자 진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연구자들은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않은 점, 가해자의 비합리·망상·폭력 성향 발전에 영향을 미친 사회문화적 요인에 대한 분석이 없는 점, 피해자 관점과 입장을 고려한 정책 제언이 없는 점 등이 그것이었다.

한국의 권력-지식은 왜 '묻지마 범죄'라는 이름에 집착하는 것일까. 김 연구자는 "지식과 권력이 담합한 결과다. 사회구조가 아니라 이상한 개인이 문제라는 시각에서, 국민들의 '주적'을 만들어내 이들을 타깃팅하는 한국의 전통적 범죄정책을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엄벌'이 내려지기는 하지만, 그 대상은 싸이코패스, 누범자, 정신질환자 등에 한정되며 결과적으로 우리와 다른 '괴물'이라고 구분짓는다는 설명이다.

◇ '이것은 여성혐오다'라는 목소리가 갖는 의미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닌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주장하는 20대 여성들이 지난해 5월 23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혐오가 죽였다'라는 주제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그러나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목격한 수많은 여성들은 이것이 특이한 사례라고 여기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내'가 없었을 뿐,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도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되는 20~30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발화하기 시작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죽임 당한다는 '페미사이드' 개념도 논의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었던 수많은 포스트잇은 이 사건에 대한 애도와 추모이자,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를 의미했다.

김 연구자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처벌해 달라기보다는 가해자의 범행 동기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여성혐오'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 연구자는 이같은 공적 발화가 많은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전망했다. '여성혐오'를 이야기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이자 진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고 △범죄 원인으로서 '젠더 사회구조'를 이야기함으로써 한국의 범죄심리 지식-권력의 담합에 처음으로 효과적인 균열을 냈으며 △법 제·개정, 정책 입안 등 제도 개선이 목표가 아닌, 젠더 사회에 순응된 개개인 안의 여성혐오를 들여다보게 했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김 연구자는 "우리는 남성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며 싸우는 대상이 △여성혐오를 핵심기제로 하는 젠더체계 △물리적 약자의 피해를 당연시하는 불링 문화 △가해자 개인의 특성으로만 범죄를 설명하느라, 사회구조의 문제를 삭제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기존의 범죄 지식-권력의 담합 △여성혐오를 덮으려 정신질환 혐오를 조장하는 학자·공권력·정책입안가·언론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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