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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국가가 버린 아이들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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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에 감금됐던 아이들

-형제 복지원에서 지낸 3년 6개월, 국가가 자행한 인간 청소
-해질녘 거리에서 놀다가 끌려간 아이들도 감금
-하루도 맞지 않는 날이 없었고 맞지 않는 날은 불안했다
- 집에 가고 싶어 우는 아이들을 감금한 국가는 사과도 보상도 없었다
-누나와 아버지, 거지 되어 정신병원에서 생활
-부랑아로 낙인 찍힌 처절한 삶만 계속
-진선미 의원, 국무총리 산하에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위원회 만들어야
- 피해자 아닌 생존자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진상 밝혀지리라는 희망 지키는 것뿐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30~19:50)
■ 방송일 : 2017년 3월 22일 (수) 오후 19:05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한종선 공동대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진선미 의원 (더불어민주당)


◇ 정관용> 30년 전인 오늘 1987년 3월 22일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이른바 사회복지기관이었던 바로 그 형제복지원 그 끔찍했던 인권유린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졌죠. 부랑인들을 선도한다, 이런 명목으로 30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불법으로 감금한 그런 시설이고요. 이곳에서 12년 동안 무려 500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온 사람들의 고통도 아직 계속되고 있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 피해보상 하나도 이뤄지고 있지 못합니다. 오늘 이 문제 짚어보도록 하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그리고 실종자 유가족모임의 한종선 공동대표가 오늘 스튜디오에 직접 나오셨습니다. 한 대표님, 어서 오십시오.

◆ 한종선> 안녕하십니까?

◇ 정관용> 직접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나오셨죠?

◆ 한종선> 네.

◇ 정관용> 몇 살 때 끌려가셨다고요?

◆ 한종선> 1984년도 때 9살의 나이로, 국민학교 2학년 다닐 때 작은 누나 12살과 같이 잡혀들어가게 됐습니다.

◇ 정관용> 그러면 초등학교 2학년생하고 누나는 5학년?

◆ 한종선> 4학년이요.

◇ 정관용> 4학년?

◆ 한종선> 네.

◇ 정관용> 초등학교 2학년하고 4학년짜리를 여기 왜 데려갑니까?

◆ 한종선> 그때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는데요. 그때 아버지가 저희를 직접 파출소에 맡긴 걸로 저는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형제복지원 자료에서 보면 집에 아버지도 없고 아이들 혼자서 방치됐다, 이렇게 해서 통장이라는 사람이 파출소에 인계했다, 이렇게 서류조작이 돼 있더라고요.

◇ 정관용> 그런데 아버님께서 좀 키우기가 어려운 그런 상황이었던 모양이죠?

◆ 한종선> 그때는 제가 봤을 때는 위탁종용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 정관용> 위탁종용?

◆ 한종선> 네. 부랑인 수용소인데 말 그대로 부랑인으로 돼 있는 사람들이 잡혀가는 곳이잖아요. 그럼 아동들이 들어가서는 안 되죠.

◇ 정관용> 안 되는 곳이죠.

◆ 한종선> 가족 있는, 그 부분에서는. 그런데 이제 사회복지사들이나 경찰관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종용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혼자서 키우기 힘드니까 국가가 지원해 주는 곳이 있으니.

◇ 정관용> 거기서 키워줄 테니 이런 식으로?

◆ 한종선> 그렇죠. 그리고 돈 벌어서 나중에 아이들을 찾아가라 이런 식으로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 정관용> 경찰관의 그런 유혹 때문에 아버님이 직접 파출소로 데려간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 한종선> 네.

◇ 정관용> 그리고 서류는 좀 조작돼 있다?

◆ 한종선> 네, 그리고 그 당시에 경찰들이 부랑인이라고 해서 사람들을 잡아갔을 때 평점이라는 걸 받았다고 돼 있어요.

◇ 정관용> 평점 올리려고 일부러 더 많이.

◆ 한종선> 그렇죠. 승진도 빨리 될 것이고.

◇ 정관용> 그렇게 갔더니 같은 나이또래의 어린아이들도 꽤 있던가요?

◆ 한종선> 그때 제가 밤에 12시 넘어서 형제복지원에 들어갔을 때 24소대로 배치가 됐었어요.

◇ 정관용> 소대 이렇게 합니까?

◆ 한종선> 군대 식으로 돼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갔는데 문을 철창문하고 나무문으로 앞뒤로 잠겨 있어요. 밖에서 열게끔 돼 있는데. 85~86명 정도가 꽉 차 있었거든요. 침대에서 서너 명씩 끼어서 자고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니까 바닥에서 완전 앞뒤로 이렇게 칼잠, 옆으로. 이렇게 꽉 붙어서 자고 이런 상태였죠.

◇ 정관용> 그런데 거기 어린아이들도 꽤 있었어요?

◆ 한종선> 그렇죠. 24소대만 86명이고 그리고 아동소대가 23, 24, 27, 28. 그리고 이제 또 청소년 소대라고 또 따로 있어요.

◇ 정관용> 아예 아동들은 따로 그렇게 편성을 하고. 거기서 만난 비슷한 또래 아이들도 보니까 대체로 그런 위탁종용 이런 식으로 해서 온 겁니까?

◆ 한종선> 그런 경우도 있었고 그리고 길 가다가 그리고 저녁 늦게 놀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 정관용> 아니, 집이 버젓이 있는데 저녁 늦게 골목길에 놀다가 그냥 끌려와요?

◆ 한종선> 그렇죠.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전화기가 없던 시절이잖아요. 전화기 한 대 가지고 쌀집이라고 하면 한 네다섯 군데 집이 누구 아버지, 뭐 불러와 이런 식으로 하던 시대니까.

◇ 정관용> 그랬죠.

◆ 한종선> 아이들이 전화번호를 기억을 못 할 때도 있죠.

◇ 정관용> 그렇죠.

◆ 한종선> 주소도 기억 못 하고. 그럼 이제 너 집 없네 이러면서 잡아가는 거죠.

◇ 정관용>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막 그러지 않으셨어요?

◆ 한종선> 하면 맞죠.

◇ 정관용> 무조건 때려요?

◆ 한종선> 네, 제가 이제 파출소에서 차에 실렸을 때 분명히 아버지가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 정관용> 파출소에서 기다려라?

◆ 한종선> 네. 아버지가 곧 온다, 이렇게 해서 누나랑 나는 그걸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들이 차에서 내려서 저희를 차에 실었을 때 그리고 파출소 소장하고 경찰관들하고 악수하고 사인하고 하는 거 봤을 때 이제 겁이 덜컥 나죠. 그래서 막 내려달라고 울었더니 파출소 앞에서는 안 때렸어요, 차 안에서는. 차가 지나갈 때 제가 창처럼 생긴, 닭장차라고 그러는데 거기 밖을 내다보면서 막 소리지르는데 아버지가 전봇대 옆에서 담배 피우고 있는 걸 봤단 말이죠. 그래서 더 울었어요. 그리고 나서 차가 지나가고 나서 갑자기 뺨을 딱 맞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죠. 그리고나서 누나 껴안고 이렇게 훌쩍훌쩍 대다가 형제복지원 안에 들어가게 됐죠.

◇ 정관용> 가서 몇 년을 계셨던 겁니까?

◆ 한종선> 3년 6개월 정도 있었습니다.

◇ 정관용> 3년 6개월?

◆ 한종선> 네.

◇ 정관용> 결국 87년 3월 이 인권유린 실상이 알려진 이후에 나오신 거네요?

◆ 한종선> 그렇죠. 사건 터지고 나서 박인근 원장이 구속되고 나서 그 당시에 부랑인이라고 국가가 내무부 훈령 410호에 의해서 사람들을 수거했잖아요, 말 그대로. 인간청소를 했는데. 그렇게 위험하다고 했으면서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을 싹 내보내버렸어요.

◇ 정관용> 기관 폐쇄하고 다 나가라.

◆ 한종선> 그렇죠.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죠. 진상규명을 그때 할 수 있었어야 됐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한테 돈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냈던 이유는 박인근 원장이 해 왔던 일들을 부각시키기 위했던 것 같아요. 부랑인들이 돈 한 푼 없이 나갔을 때 이들은 분명히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때 당시의 신문기사를 찾아보니까 그런 기사들이 상당수 있더라고요. 당연히 집이 있던 사람들을 돈 한 푼 안 주고 내보냈을 때 이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먹고살려면 당장에 할 게 없죠. 진짜 말 그대로 구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거죠. 그걸 이상하게 부각을 시켜서 여론몰이를 했고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렸죠.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피해자들이 묵묵히 아무리 민주국가가 됐다 하더라도.

◇ 정관용> 말을 못 하고.

◆ 한종선> 이걸 말을 못 하는 상황이 돼버리죠.

◇ 정관용> 거기 3년 6개월 계시면서 수도 없이 맞았어요?

◆ 한종선> 하루도 안 빠지고 맞았어요. 하루도 안 빠지고. 오히려 안 맞고 약간이라도 덜 맞는 날이 오면 그게 더 불안한 거예요, 이제.

◇ 정관용> 누나는 성적인 피해도 막 입었습니까?

◆ 한종선> 그건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그 소대에 있었던 누나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놀림을 많이 받았죠, 제가.

◇ 정관용> 어떤 일을 당했답니까?

◆ 한종선> 그러니까 누나가 소대 이탈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니까 거기는 군대식이잖아요. 그러면 밥 먹으러 갈 때 사열종대로 맞춰서 구보도 돌고 이렇게 열을 맞춰 서 있는데 누나가 막 뛰어오는 거예요. 23소대를 이탈을 해서. 그리고 나 보고 집에 가자고 한단 말이죠. 그럼 이제 저도 누나가 보이니까 누나 잡고 울고 막 집에 가려고 하면 막 두들겨 패요. 그게 23소대에서는 조장들이 관리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누나가. 그래서 매타작 같은 거에서부터 하다가 성고문까지 했다. 이제 그 이야기가 또 우리 소대에 퍼지고 하니까 소대 형들이 또 그거 가지고 약올리기도 하고.

◇ 정관용>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는 모습도 봤습니까?

◆ 한종선> 제가 그건 정확하게 한 서너 건 중에서 정확하게 본 건 딱 한 건인데 그것도 살아남은 아이 책에 제가 묘사한 그림 중의 하나인데.

◇ 정관용> 그 책이 지난 2012년에 나온 책이죠?

◆ 한종선> 그렇죠. 제가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하면서 썼던 건데. 그때 그 원생이 간질환자가 있었어요. 간질이 약간 있었는데 한여름에 너무 심하게 두들겨 맞다 보니까 조장 다리를 붙잡고 살려달라고 막 하는데 그때 하필이면 발작이 온 거예요. 발작이 와 버리니까 막 발 붙잡고 부들부들 떠니까 조장 입장에서 짜증나는 거예요, 덥고 말 안 듣고 하니까. 그러니까 막 발로 지근지근 밟고 주먹으로 때리다가 몽둥이 가지고 이렇게 딱 치려고 할 때 그 순간에 애가 갑자기 정신이 돌아와버린 거예요, 순간적으로. 그런데 그 순간에 그 몽둥이 맞고 쓰러졌는데 부들부들 떠는 거예요.

◇ 정관용> 바로 즉사.

◆ 한종선> 즉사라고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람이 그렇게도 죽을 수 있다라는 것은 짐작이 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쓰러졌는데 조장들이 야,물 떠와 이렇게 해서 물을 끼얹는데 못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조장이 소대장한테 이야기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요.

◇ 정관용> 75년에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만들어진 기관이고 전두환 정권 들어선 이후에 올림픽도 치러야 된다 이러면서 소위 떠돌이, 앵벌이, 거지, 행려병자 이런 사람들을 여기다 강제수용시키자 해서 정부가 1년에 한 20억씩 돈도 주고 이런 곳인데 정말 길거리에 떠도는 부랑인들뿐 아니라 정말 이유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잡혀왔다는 거 아닙니까?

◆ 한종선> 제가 봤을 때는 거의 한 98%는 일반인이라고 봐요.

◇ 정관용> 그리고 군대식 조직과 온갖 폭력으로 그냥 강제수용.

◆ 한종선> 네.

◇ 정관용> 그리고 수없이 많은, 12년 동안 지금 500명 넘는 사람이 사망. 그런 거죠?

◆ 한종선> 그 자체 기록, 형제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는 513명인데 폐쇄되고 나서 저희가 대책위에서 또다시 무연고자 시신을 확인해 본 결과 또 시신을 찾아냈죠. 그래서 다 합쳐서 551구가 돼 버렸어요.

◇ 정관용> 551.

◆ 한종선> 그러나 그 숫자보다는 더 될 거예요, 아마도.

◇ 정관용> 그렇겠죠.

◆ 한종선> 진상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정도인데.

◇ 정관용> 그 3년 6개월 끌려갔다가 강제수용 당하고 나오신 이후에 혹시 단돈 얼마라도 보상금 받으신 거 있어요?

◆ 한종선>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 정관용> 전혀 없어요?

◆ 한종선> 저는 형제복지원이 폐쇄되고 그리고 서울 소년의 집이라는 고아원으로 또다시 전원조치될 때 수녀님한테도 이야기를 했다시피 여기 아버지랑 누나가 있다. 이렇게 했을 때 수녀님이 일단 너부터 가야 된다. 상황이 지금 너무 급박하다 해서 저만 다른 데로 가게 됐는데 그 후로 아버지랑 누나랑 생이별이 됐거든요. 그러면서 그때부터 저는 머릿속에 형제복지원 사건은 언젠가는 해결을 누군가는 해 주겠지 하면서 믿어왔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안 됐었고 그리고 그 당시에 개구리소년 사건 터졌을 때도 그 당시에 같이 전원조치됐었던 친구들이 하는 말이 쟤네들도 분명히 어디 고아원에 잡혀갔을 것이다, 우리처럼.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했었죠.

◇ 정관용> 그렇게 생이별 당했던 아버지랑 누나는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됐습니까?

◆ 한종선> 아버지랑 누나는 제가 2007년도에 군산 그쪽 미군 장병숙소에서 일을 노가다를 뛰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허리를 다쳤어요. 그러다가 먹고사는 일이 안 되니까, 도저히. 초등학교도 못 나온 제가 어디서 취직이 안 되니까. 그래서 신문고에다 신세한탄 식으로 글을 올렸더니 기초생활수급자를 신청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신청하러 갔는데 거기에서 아버지랑 누나의 주소가 나온 거예요.

◇ 정관용> 인적사항들 쭉 이야기하기 시작하니까.

◆ 한종선> 네. 그 전에도 여러 번 시도를 해 봤지만 그때는 안 나왔었거든요.

◇ 정관용> 그래요.

◆ 한종선> 그런데 알고 봤더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가족들이 부양을 국가에 맡기게끔 돼 있더라고요.

◇ 정관용> 가족들한테 경제력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는 과정에서.

◆ 한종선> 그래서 이제 제가 거기를 찾아가 봤더니 아버지는 울산정신병원에 있고 누나는 안산정신병원에 있는 거예요. 언제부터 여기 있었냐 하니까 둘 다 89년도 때, 이제 87년도 때 다 와서 89년도까지 부산에서 진짜 거지 아닌 거지가 돼 버린 거예요. 정신도 이상한 상태에서. 그래서 경찰에 의해서 잡혀서 그때부터 정신병원에 있었다라고 하더라고요.

◇ 정관용> 아버지도 누나도 한종선 씨 본인도 한가족 전체가 완전히 풍비박산이 난 거로군요. 3년 6개월 강제로 수용당해서 나와서 또 서울의 소년의 집에서 사시다가.

◆ 한종선> 그렇죠.

◇ 정관용> 본인도 노다가 이런 거밖에는 할 일이 없었고 완전히 망가진 그 인생들에 대해서 아무도 보상을 안 했다?

◆ 한종선> 네. 누구도 일단 사과를 안 했죠.

◇ 정관용> 사과도 없었고.

◆ 한종선> 그렇죠.

◇ 정관용> 87년에 이 실상이 알려진 후에도 그 당시 책임자였던 박인근, 아까 언급하신 그 원장은 횡령 죄목으로 딱 징역 2년 6개월만 살았을 뿐입니다.

◆ 한종선> 네.

◇ 정관용> 그 당시 오히려 정치권에서는 박인근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막 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 한종선> 전두환이 직접 와서 부산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 정관용> 그런 인권유린 등등은 그냥 묻혀버린 거죠.

◆ 한종선> 그렇죠. 감금죄가 어떻게 보면 더 형제복지원 사건의 실마리 중의 실마리인데 감금죄 부분을 일단 무죄를 해버렸잖아요. 인권유린 사안 중에서 어떻게 보면 첫 부분인데. 저는 그 부분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 정관용> 알겠습니다. 어떻게든 이걸 좀 진상 밝혀보자라고 하는 취지로 국회에서도 좀 움직임이 있습니다. 지난 국회부터 관련해서 법안을 계속 내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잠깐 전화로 연결하겠습니다. 진 의원, 안녕하세요.

◆ 진선미> 안녕하세요.

◇ 정관용> 왜 이게 안 됩니까? 진상규명조차 안 되고 피해보상은커녕. 왜 안 됩니까?

◆ 진선미> 우선 먼저 종선 씨, 반가워요.

◆ 한종선> 안녕하세요.

◆ 진선미> 방금 그렇게 인터뷰한 우리 종선씨를 거의 2012년부터 만나서 사실 19대 내내 그리고 20대 들어와서까지 1호 법안으로 냈는데요. 기본적으로 이 문제가 계속 지연이 되는 것은 박근혜 정권의 기본적인 논조가 과거사는 이미 다 됐다.

◇ 정관용> 그냥 묻어버리자.

◆ 진선미> 진상규명위원회 예전에 만들어졌었고 그때 왜 주장하지 않았냐. 그리고 다른 사건들과 비했을 때 너무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면 다른 사건들의 피해자는 어떻게 할 거냐. 그리고 나라의 예산이 많이 든다, 뭐 이런 걸로 사실은 국회 안에서 의원들끼리 의견만 모아지면 통과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문제, 그 법안을 통해서 그 법이 통과됐을 때 그 법을 집행하는 게 결국은 행정부이지 않습니까?

◇ 정관용> 그렇죠.

◆ 진선미> 그래서 관계부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내내 초기에는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는 조금 전진적인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서 이건 안 된다라고 계속 안전행정부에서 의견을 개진하니까 이제 한발자국도 나가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죠.

◇ 정관용> 왜 도가니 사건으로 많은 분들 알고 계신 거 있잖아요.

◆ 진선미> 네.

◇ 정관용> 그런 데 비교해 본다면 사실 인권유린과 사망자의 숫자나 이런 것들은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 진선미> 어마어마하죠.

◇ 정관용> 이 어마어마한 일을 조금도 진척을 못 시킨다. 참 이해할 수가 없네요.

◆ 진선미> 한국전쟁 이후에 사실은 한 장소에서 500명이 넘게 사망한 건 유일무이한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부산 쪽에 있는 새누리당, 그 당시 새누리당 의원님들조차도 단 한 분도 의견을, 그 발의에도 동참해 주시지 않으셨고요. 그리고 안행위에서 얘기를 하면 개인적으로는 관심들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지난번에 어느 의원님 같은 경우에는 정신과 닥터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그게 말이 되냐. 그렇게 심리적으로 부랑아라는 낙인이 찍혀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학대를 받으면 그분들이 본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에 했어야 된다, 이런 얘기는 말도 안 된다, 이런 얘기도 해 주시고는 그랬는데 결국은 이게 정권, 행정부의 입장이 중요한 거거든요.

◇ 정관용> 내신 법안 주요 내용이 뭐죠?

◆ 진선미> 낸 법안은요. 실제로 이 부분이 앞에서 종선 씨도 얘기했지만 진상이 제대로 어떻게 돼 있는지가 규명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국무총리 산하에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자. 그래서 그 위원회에서 조사를 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가 있고 그 피해가 어떤 내용이고. 그러면 치료비나 여러 가지의 보상대안이나 이런 것들도 고민하고 또 위령하는 사업들도 좀 고민해 보자, 이런 내용입니다.

◇ 정관용> 먼저 진상이 밝혀져야 말씀하신 대로 치료비, 보상비, 위령, 뭐가 하나 시작이 되는 거죠?

◆ 진선미> 그렇습니다.

◇ 정관용> 그런데 그 당시의 원장 박인근은 이미 사망했죠?

◆ 진선미> 그렇죠. 19대 국회 중에 사망했습니다.

◇ 정관용> 그럼 진상규명 진척을 볼 수는 있을까요, 위원회를 만든다고 해서?

◆ 진선미> 저는 일단 아까도 종선 씨가 말씀하셨는데요. 지금 이 모든 피해자들은 본인들이 부랑아라는 낙인이 찍혀서 뭔가 국가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30년 동안 아무도 그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안 가져줬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국가가 관심을 갖고 있고 위원회를 꾸려서 뭔가를 조사한다라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의 많은 부분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관용> 알겠습니다.

◆ 진선미> 그게 정말 시작이죠.

◇ 정관용> 그리고 이런 피해를 직접 당하신 분들을 한 분, 한 분 찾아서 만나다 보면 진상이 밝혀지는 거죠.

◆ 진선미> 그렇습니다.

◇ 정관용> 대선 이후에는 좀 기대해 봐도 될까요?

◆ 진선미> 그럼요. 그게 필요합니다. 정권교체 반드시 해서 이 문제들도 좀 새롭게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정관용> 꼭 좀 책임지고 해 주시기 부탁을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 진선미> 고맙습니다.

◇ 정관용>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이었습니다. 한종선 씨.

◆ 한종선> 네.

◇ 정관용> 믿음이 좀 가세요?

◆ 한종선> 네.

◇ 정관용> 정말이요?

◆ 한종선> 일단 제가 믿음이 개인적으로 믿음을 주냐, 안 주냐를 떠나서 믿음을 갖고 가는 게 그나마 희망으로써.

◇ 정관용> 그렇죠.

◆ 한종선> 낫다고 봐요. 그게 이제 제가 피해자로서가 아닌 생존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 정관용>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실종자, 유가족 모임. 이런 모임이 지금 몇 분 정도 같이 활동하십니까?

◆ 한종선> 지금 연락 가능한 사람들은 한 240여 명 되는데 그중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서 한 두세 명 이렇게 되죠.

◇ 정관용> 그렇죠. 그 이백사십 분 연락 간간이라도 취해 보면 다들 정말 인생이 망가지신 거죠?

◆ 한종선> 그렇죠.

◇ 정관용> 건강도 망가지시고.

◆ 한종선> 네. 그리고 일단 생계가 너무 어렵다 보니까.

◇ 정관용> 그렇죠.

◆ 한종선> 이향직 씨 같은 경우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촛불집회 가서 서명을 이렇게 열심히 받고 그리고 또 김대우 씨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부산 진경찰서 앞에서 잡혀갔는데 거기에서 세 번이나 잡혀간 것에 대한 억울함. 그러니까 부산 진경찰서 왜 당신들이 나를 잡아갔냐. 그 사과를 받고 싶다 해서 1인시위도 꾸준히 하시는 분도 있고.

◇ 정관용> 그렇죠. 우리 한종선 씨도 아까 2012년 책 펴내시기 전에.

◆ 한종선> 국회 앞에서.

◇ 정관용> 홀로 1인시위를 하시면서 이게 조금씩조금씩 또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 한종선> 그렇죠. 그때 노숙으로 거기에서, 집이 구미다 보니까 수급자가 돈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돗자리 하나만 들고 올라와서 국회 앞에서 노숙을 하면서 했었죠.

◇ 정관용> 오랫동안 참 외롭게 투쟁하고 싸워오셨는데 이제 저희들도 함께합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시작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꼭 좀 이 진상규명 법도 만들어지고 피해보상에 이르기까지 함께 힘을 좀 보태겠습니다.

◆ 한종선> 감사합니다.

◇ 정관용>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한종선> 잊지 않고 다시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정관용> 한종선 공동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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