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3년, 나도 수다 떨며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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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청년들의 남한 적응기] ②

글 싣는 순서
① 몰래 보던 드라마속 나라로 탈출했지만 웃음이 사라졌다
② 탈북 3년, 나도 수다 떨며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계속…
위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음 (사진=자료사진)

 

나는 꽤 오랫동안 말을 하는 것에 움츠러들었다. 낯선 문화, 외래어, 어색한 내 말투.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두려웠다.

편의점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 손님이 급히 들어오며 밴드를 찾은 적이 있었다.

"아가씨, 밴드가 어디 있어요?"

밴드, 밴드… 그게 뭘까…?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없어요."

(사진=자료사진)

 

손님은 편의점에 밴드가 없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리며 두리번거리더니 바로 내 앞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

"여기 있네요?"

순간 나는 얼굴이 빨개졌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 손님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더니 나갔다. 그런 일을 반복해가며 나는 낯선 물건들의 이름을 익혔고, 그 이름은 절대로 잊지 않았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옆 포장마차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항상 지나다니면서 봐왔었지만 그 맛을 알지 못했다.

꼭 먹어보고 싶은 생각에 따끈한 붕어빵 몇 개를 사서 품에 꼭 껴안고 집으로 뛰어왔다. 예전부터 붕어빵 맛이 정말 궁금했었다. '붕어가 들어가 있으니 비리겠지? 안 비리게 하는 기술이 있나?' 밀가루와 붕어의 조합이 어떤 맛을 낼지가 제일 궁금했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붕어빵을 집어 들었다. 나는 맛을 상상하며, 한입 크게 뜯어 물었다. 붕어빵 안에는 붕어가 아니라 달콤한 팥이 들어있었다.

'이런…'

혼자서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퇴근한 이모에게 이야기했더니 이모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나는 이모가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이후로 붕어빵 사건은 모든 사람들의 웃음 소재가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마다 크게 웃곤 했다. 사람들도 웃고, 나도 웃고, 붕어빵도 웃었다.

나는 브로커 비용만 갚으면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았다. 편의점에서 한 달을 꼬박 일하면 7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까지 더해 한 달에 100만 원씩 갚아나가기로 했다.

나는 한 달 용돈 5만 원으로 생활하며, 밖에서 밥 한 번 사먹지 않고, 예쁜 옷 한 벌 사보지 못하고, 한 달에 하루 정도만 쉬며 일을 했다.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영화관도 한 번 가보지 못했다. 나는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1년 만에 1,200만 원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이제는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싶고, 수다 떨며 놀러 다니고도 싶고, 남들이 누리는 소박한 여유를 나도 따라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내 또래들처럼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다.

◇ 3년 만에 만난 가족과의 상봉

그러던 중에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북에 있는 가족들이 오겠다고 했다. 내가 한국으로 넘어온 이후, 가족들은 내 사망신고를 한 뒤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감시의 대상이었고, 내가 한국에 정착해가는 모습에 용기를 내었는지 아빠와 엄마, 오빠 모두 한국으로 넘어오겠다고 했다. 가족들이 모두 오려면 1,800만 원이 필요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빚을 갚기 위해 살았던 그 생활을, 가족들도 똑같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은 여유를 가지고 적응하게 하고 싶었다.

친구들이야 나중에 만나면 되지, 영화도 나중에 실컷 보면 되지, 공부는 가족들이 오고 나면 하지 뭐. 그렇게 모든 걸 뒤로 한 채 다시 일을 시작했다. 다시 꼬박 2년이 걸렸다. 오직 가족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쉬지 않고 일했던 시간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지만, 그 당시 마음 한편에는 뭔지 모를 불만들이 가득했고, 돈의 노예처럼 살 수밖에 없는 내 상황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쩌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나가 자기소개 같은 걸 하게 될 때면 대학생인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무슨 일을 하냐는 질문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하면, 돈도 중요하지만 한창 공부할 나이에 공부를 하지 그러냐는 말을 들을 때면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고 그냥 웃어넘기곤 했다. 참 많이 힘든 시기였고, 너무 힘든 날에는 일기를 쓰곤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의 일기다.

2011. 10. 15. 토요일. 날씨 맑음
'오늘은 아빠 생일이다.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겠지? 아픈 데는 없는지…. 선물 하나 드리지 못하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음에 안타깝다. 오늘은 토요일 공휴일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공휴일이란 없어진 지가 오래다. 한국에선 주말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 다닌다지?

하지만 나에게 주말은 그냥 평일이나 다름없이 일해야 하는 날이다. 이런 현실이 이제는 슬프지도 않다. 너무도 당연해왔고 주말에 휴식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내가 힘들어도 참는 이유는 다 가족들 때문이다. 내가 열심히 해야 하루 빨리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기에….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나는 힘들지만 힘들지 않고 울고 싶지만 울지 않는다.

아빠! 술 때문에 항상 건강이 안 좋으셨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나는 아빠랑 우리 가족들 만나기 위해 여기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다음번 생일은 한국에서 꼭 챙겨드릴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여러모로 울적한 날이다. 고향 생각이 많이 나고 아빠 엄마가 많이, 아주 많이 보고 싶다. 내년엔 만날 수 있겠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신이 있다면 도와주실 거야.'


그렇게 2년이 흘러, 마침내 2012년 6월 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 중국과 태국을 거쳐, 부모님과 오빠 모두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3년 만에 가족들을 다시 만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특히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너무나 많이 생겨 마음이 아팠다. 그동안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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