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전후 긴박했던 한반도 주변 …어떤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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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상의 역사산책 76]일본의 항복이 늦었으면 일본이 분단됐다.

◈ 소련군이 침공하자 혼란에 빠진 '만주'

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하고 있는 소련군 T-34 탱크

 

1945년 8월 7일 오후 4시 30분 모스크바의 크레믈린궁.

일본의 히로시마에 신형폭탄 원폭이 투하됐다는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전쟁의 열매는 힘으로 따지 않으면 확실히 맛볼 수 없다"

이틀이 지난 8월 9일 새벽 0시.

소련과 만주 국경에 진주해 있던 소련군이 일제히 국경을 넘어 만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작전에는 소련군 157만명과 화포. 박격포 2만 6,137문, 전차와 자주포 5,566량, 군용기 3,721대를 동원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만주에 그치지 않고 이틀 후에는 한반도 북단 동해안의 경흥, 함흥까지 밀고 내려왔다.

사할린 남부에도 소련 육군과 해군, 해병대가 국경선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공격 루트 (사진=전쟁기념관 제공)

 

소련군의 기습에 놀란 것은 공격을 당한 일본만이 아니었다.

원폭을 투하한 뒤 일본의 항복 소식만 기다리던 미국도 당황했고, 만주를 포함한 중국 전체를 통일하려던 장개석도 충격을 받았다.

다만 연안에서 일본군이 철수하면 장개석 정부와 일전을 벌이려던 모택동과 소련군에 편입되어 한반도 진입을 준비하던 김일성의 88여단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소련군은 만주를 북중국에서 고립시키고 한반도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어 나갔다.

8월 15일 일왕이 항복선언을 했으나 소련군과 관동군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동부국경에 있던 후토우 요새에서 민간인을 포함한 1,900명이 옥쇄로 모두 죽은 26일에야 만주에서의 전투가 종식되었다.

만주의 심장부 하얼빈시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련군.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제일 먼저 관동군의 수뇌부와 푸이 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황족과 수뇌부를 연행해 전범재판에 넘겼다.

이어 '전리품'이 된 공장 등 산업시설을 뜯어내 기차에 싣고 소련으로 가져갔다.

포로로 잡힌 관동군 60만 명은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

이 와중에 군기가 풀린 소련군은 도처에서 약탈과 폭행, 강간을 일삼았다.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자 중국 공산당은 그 기회를 틈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스탈린이 낮게 평가했던 모택동의 홍군이 소련군의 점령이라는 특이한 정치공간을 이용해 저변을 넓혀 나간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후 중경에서 평화협상을 벌이던 장계석(왼쪽)과 모택동

 

일본이 패망한 후 만주에는 조선인이 110만 명이나 남아 있었다.

일본군이 떠나자 만주 각 지역에서 중국인에 의한 조선인 박해 사건이 잇따랐다.

특히 조선인 비율이 낮은 마을이 괴뢰 만주국의 패잔병이나 마적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 주거지를 버리고 하얼빈. 목단강. 가목사. 연길. 길림등 좌익계열의 독립군인 항일연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반국민당, 친공산당'으로 기울어 중공군에 대거 입대한다.

◈ 소련의 진격에 당황한 미국,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을 결정하다

미소간의 정략에 의해 그어진 38도선을 미군이 지키고 있다.

 

1945년 8월 11일 새벽, 미국 전쟁부 작전국 전략정책단 정책과 사무실.

전략정책단 단장인 린컨 준장과 그 단원인 본스틸 대령과 러스크 대령은 벽에 걸린 한반도 사진을 보면서 토론을 벌였다.

이는 소련이 파죽지세로 만주와 한반도로 쳐들어오자 어떻게 하든 어느 지점에서 멈추도록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만주는 소련군의 참전 대가로 넘겨주기로 했지만, 진공상태로 남아 있는 한반도를 통째로 넘겨줄 수 없었다.

미국이 독점할 생각이었던 일본 옆에 공산국가가 탄생할 경우 방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싶었지만,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려 1,6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었다.

린컨 준장이 받은 명령은 '연합국의 항복접수 지역(세력권) 분할에 관한 문서를 기안하라'는 지시와 '가능한 한 한반도 북쪽'을 경계선으로 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기준을 갖고 지도를 관찰했다.

1.소련이 받아들일 만한 선을 선택할 것
2.포로수용소와 수도 서울을 충분히 포함할 정도로 북쪽을 택할 것
3.일본군 자체의 관할권 분할과 같은 군사적 분계선을 정할 것

세 사람은 쉽게 38도선을 정했다.

이 방안은 상부의 결재를 받아 최종 확정했다.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38도선을 경계로 남에서는 미군이, 북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는다는 '일반명령 제1호'를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한반도와 만주, 일본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스탈린. 그는 한반도보다는 만주의 이권과 일본의 북쪽에 관심을 쏟았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미국에게 스탈린으로부터 답장이 신속하게 왔다.

그는 "실질적 내용에 대해 아무 것도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일본의 홋카이도 북부를 넘겨주고, 일본 점령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38도선을 바다로 연결해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물론 일본의 38도선 북쪽을 거저 가지가겠다는 의도였다.

이에 대해 트루먼 대통령은 홋카이도를 포함한 일본의 4개 섬은 이미 맥아더 장군의 항복 지역으로 할당되었다며 거절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열도 대신 한반도가 분할되고, 이후 냉전의 최전선에서 같은 민족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된다.

◈ 질질 끈 일본의 항복 결정…수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다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현장. 이 폭발로 9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1945년 7월 27일 일본정부는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알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해. 공군이 궤멸되고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까지 연일 B-29 폭격기의 융단폭격을 받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소련군의 침공과 원폭 투하 등을 피하고 전쟁당사자인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물론 한반도의 남북분단이란 참극도 막을 수 있었다.

불행히도 스즈키 간타로 수상은 공식 기자회견에서 '포츠담선언을 묵살한다'고 발표했다.

기다렸다는듯이 미국은 곧바로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히로시마 시민 34만 명 중 7만 명이 죽고 13만 명이 부상했으며, 도시의 60%가 파괴되었다.

나가사키에서는 4만 명이 죽고 5만 명이 다쳤다.

나가사키가 잿더미로 변하기 2시간 전 모스크바.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이 1941년에 체결한 일·소 불가침조약 파기와 선전포고를 담은 문서를 사토 일본대사에게 전달했다.

곧바로 소련군 탱크와 보병, 폭격기 편대가 만주로 진격했다.

엉뚱하게 소련을 통해 연합군과의 평화교섭을 시도하던 강경파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일본의 지도층에게는 원자폭탄보다는 소련의 참전이 더 큰 충격이었다.

신형폭탄인 원폭의 정체나 위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반면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의 위협은 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일왕 쇼와. 항복의 시기를 잘 선택하고 이용가치를 간파한 미국 때문에 교수형을 면할 수 있었다.

 

연일 만나면 '항복하자 VS 계속 전쟁하자'고 싸우던 최고전쟁지도회의는 마침내 쇼와 일왕에게 결단을 요청하기로 했다.

8월 9일 밤 11시 50분, 지하참호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도고 외상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주장하고 아나미 육군대신이 본토결전을 내세우는 등 또다시 강온파 내분이 시작됐다.

쇼와는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며 포츠담선언 수락을 찬성했다.

참석자들 사이에 오열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고 외상은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항복 의사를 미국 등 연합국에 전했다.

8월 15일 낮 12시, 일왕의 항복선언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오열하는 일본인들.

 

당시 일본인들은 유럽의 전쟁터보다 더 넓은 지역에 3천만 명이 넘는 민간인들이 고국을 떠나 흩어져 있었다.

일본정부는 암호를 통해 대사관 등 해외 기관에 밀령을 내렸다.

"일본 거류민은 가능한 한 현지에 정착하는 방안을 모색하라"

일본정부는 이들을 보호하지 않고 포기한 것이다.

◈ 조선총독부, 여운형의 건준에게 정권을 이양했다가 서둘러 취소하다

몽양 여운형. 외세의 간섭이 없이 그가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를 망라해 임시정부를 세웠다면 분단이나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일왕의 항복선언이 눈 앞에 닥아오자,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엔도 류사큐는 70만 명이 넘는 일본인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부하들의 조언을 받아 항복선언 4시간 전인 8월 15일 아침 8시에 총독부에 조선인들의 신망이 두터운 여운형을 초대했다.

엔도는 조선총독부 행정기구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자치조직에 넘겨 혼란을 최소화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여운형은 곧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정권 인수와 치안 유지에 나섰다.

해방이 되었다는 사실이 조선민중에게 알려진 것은 8.15 다음날인 16일이었다.

이날 오전 10시 총독부가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에 있는 형무소에서 1만여 명의 정치범과 사상범을 석방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만세 소리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 사거리에 나와서 환호하는 서울시민들. 뒤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착착 지방조직을 결성하고 있는 사이에 조선총독부의 기류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일본정부로부터 38도선 이북은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맡고, 남쪽은 미군이 담당한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들은 총독부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9월 8일 미군이 상륙할 때 여운형은 환영 메시지를 들고 인천을 찾았으나 면회는 거절됐다.

맥아더의 포고문이 잇따라 발표됐다.

"연합군에 적의 있는 행위를 한 자는 재판을 통해 사형 혹은 그 법정이 결정하는 기타의 처벌을 받는다"는 위협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반면 소련군 포고문의 내용은 화끈했다.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라고 선언했다.

이어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소련 해방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가 열렸다.

조만식 선생의 환영사에 이어 소련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이 답사를 하며 한 젊은이를 가리켜 "조선 인민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김일성의 그 당시 나이는 만 33살이었다.

김일성이 한국전쟁 시기에 후방지역의 최고사령부로 공화국 영웅과 모범전투원들을 불러 대화를 나누는 모습.

 

한편, 연안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이던 조선의용군 1천여 명은 심양을 거쳐 신의주로 들어가려다 소련군의 제지를 받았다.

소련군은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입국을 거부했다.

결국 무장부대는 입국을 포기하고 중국내전으로 뛰어들었다.

이들의 지도자인 조선의용군 사령관인 무정, 독립동맹 주석 김두봉, 부주석인 최창익. 한빈 등 70여 명만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이들 모두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 세력에 의해 숙청된다.

남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을 미군정은 환대했다.

1945년 10월 20일, 미 군정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미군 환영대회’에서 나흘전 귀국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에 선글라스를 쓴 이는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미국 입장에서는 정체도 모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보다는 미국에서 오래 산 친미 성향의 이승만을 추대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한달 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환영 행사도 없이 찬 바람 부는 서울거리를 장갑차에 실려 쓸쓸하게 경교장으로 들어간다.

3년 후 남한과 북한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아 정권을 장악한 인물은 이승만과 김일성 두 사람이었다.

이들은 강대국의 후원 속에 여운형, 김구로 대표되는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시신을 밟고 정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소련군과 미군은 철수했지만 수천 명의 군사고문단이 남아 군부를 지도한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각기 '북진통일', '적화통일'을 외치며 무기를 공급받아 전쟁을 준비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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